마지막 연인 | 찬쉐 지음 |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516쪽 | 1만6000원
찬쉐(残雪). 우리말로는 잔설이다. ‘녹지 않아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눈’ ‘산꼭대기의 가장 순수한 눈’이라는 두 의미를 담은 필명을 쓰는 중국 작가. 한국에선 생소하지만, ‘중국의 카프카’란 찬사를 받으며 노벨상 후보로 꾸준히 언급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그의 소설이다.
이질적인 가상의 나라 A국과 남부 열대 지역의 고무나무 농장을 배경으로 커플 세 쌍이 등장한다. 의류 회사 매니저 존과 아내 마리아, 이 회사의 사장 빈센트와 아내 리사, 고무나무 농장 주인 레이건과 애인 에다. 모두 단물 빠진 껌을 버리지 못해 물고 있는 듯한 관계다. 사랑의 정점을 지나 권태에 빠져 허우적댄다. 상황을 벗어나려 각자 안간힘 쓰지만 수렁은 깊어진다. 존은 책에 몰두하고 마리아는 집 꾸미기에 집착한다. 빈센트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리사는 대장정을 떠나며, 레이건은 도망치려는 연인 에다를 뒤쫓는다.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는 문장이 이들의 관계를 상징한다.
그림에 비유하자면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이요, 장미꽃과 뱀·열대 동물이 마구 엉킨 천경자의 이국적 풍물화 같다. 퇴폐적이며 음험하다. 주인공들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몽환경(夢幻境) 세상을 산다. 대화는 하나같이 선문답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나 그 실체는 또렷하지 않다. 책을 덮는 순간, 독주에 취한 듯 알딸딸하다.
찬쉐는 후난성 지역신문사에서 근무하던 부모가 극우주의자로 몰려 노동교화소로 끌려간 뒤 할머니 손에 길러지며 무속 신앙에 영향받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카프카에 심취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동서양을 결합한 독특한 그의 작품 세계가 형성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