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뒤덮인 뉴욕 거리, 낙서 가득한 회색 담장 앞을 우산 쓴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검정 코트, 회색 원피스, 검정 부츠…. 무채색 세상에서 여자의 빨간 우산만 한 점 꽃잎처럼 선명하다. 미국 사진가 사울 레이터(Leiter, 1923~2013)가 1958년쯤 찍은 ‘빨간 우산’(가로 32.6cm, 세로 49.3cm)이다. 1940~1970년대 뉴욕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레이터는 흑백 사진이 주류였던 시절 과감히 컬러 사진에 뛰어들어 ‘컬러 사진의 선구자’로 불린다.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전의 레이터는 이런 말을 남겼다. 먼 곳을 갈망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에 집중해 자신이 사는 뉴욕과 가족 친지를 찍었다. 김 서린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이미지, 차양이나 기둥, 공사장 철근으로 자연스레 분할된 화면 등을 감각적으로 렌즈에 담았다. 회화적 색감과 영화적 구도가 어우러진 그의 사진들은 영화 ‘캐롤’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그를 회고하는 전시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가 다음 달 27일까지 서울 남창동 피크닉에서 열린다. 사진 190여 점과 미공개 슬라이드 필름 등이 나왔다. 전시가 입소문 나면서 레이터 관련 도서도 인기다. 레이터의 사진과 글이 담긴 ‘영원히 사울레이터’(윌북)는 출간 한 달 만에 5000부 넘게 팔렸다. 절판된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윌북)은 중고책 시장에서 정가(2만2000원)의 세 배를 훌쩍 넘는 7만원을 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