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의 역사
윌리엄 시트웰 지음|문희경 옮김|소소의책|312쪽|2만8000원
미식 인문학
김복래 지음|헬스레터|653쪽|3만4800원
미슐랭에서 별을 받은 서울 레스토랑이 30개가 넘고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쓰이지만 정작 파인 다이닝의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랑스 혁명기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정치가, 혹은 그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피의 숙청이 고급 식당(fine dining)의 시대를 불러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영국 음식평론가 윌리엄 시트웰은 ‘외식의 역사(원제 Restaurant)’에 이렇게 썼다. ‘공포정치’의 주역 로베스피에르가 음식 문화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 귀족들이 처형당하고 감옥에 갇히자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프랑스 전역의 요리사와 집사, 하녀들은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습격한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는 약 200만명의 하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2800만명이었다. 지방 저택에서 일하던 수많은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올라왔다. 그 결과 파리에 레스토랑들이 문을 열었다. 요리사들이 주방을 책임지고 집사와 하인들은 접객을 맡았다. 귀족 가문의 높은 기준에 맞춰 훈련한 대로 요리를 만들고 손님을 접대했다. 과격한 혁명가들도 잘 먹는 건 좋아했다. 투옥된 귀족들도 레스토랑의 고객이었다. 그들은 경비병을 매수해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레스토랑’은 프랑스 옛말로 기력 회복을 위해 ‘고기를 푹 넣고 끓인 수프’라는 뜻. 1765년 불랑제라는 요리사가 자기 식당에서 ‘레스토랑’을 판 데서 유래했다.
영국 외식 문화에 대변혁을 가지고 온 사람은 헨리 8세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수도원 해체령을 내렸다. 여행자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며 접객소 역할을 하던 수도원이 사라지자 여행자들은 갈 곳을 잃었다. 종교 휴일에 지역 공동체가 열던 축제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어울려 먹고 마실 곳도 사라졌다. 수도원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점을 차리자 지역민과 여행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결과 16세기에 영국에서는 선술집이 크게 성장했다. 1577년 영국 선술집 개수는 2만4000개로 주민 142명당 한 개꼴이었고, 이후 50년간 이 수치가 두 배로 증가했다. 영국이 ‘펍(pub)의 나라’로 자리 잡은 건 이런 배경에서다.
‘펍의 나라’ 영국이 음식 맛 없기로 유명한 나라가 된 이유는 뭘까? 영국인인 저자는 2차 대전에서 이유를 찾는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엔 배급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좋은 레스토랑이 들어설 필요가 없었고, 전시 체제에 국민들 몸에 밴 절약 습관이 외식을 꺼리게 했다는 것이다. ‘요리의 불모지’ 런던을 노린 건 바다 건너 프랑스였다. 프랑스 형제 요리사 알베르 루와 미셸 루가 영국 최초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르가브로슈’를 1967년 런던에 차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레스토랑 발달사를 맛깔나게 서술한 책. 프랑스 음식 문화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독자들에겐 함께 출간된 ‘미식 인문학’을 권한다. 프랑스 경제·문화사 전공자이자 안동대 교수인 저자는 “앙리 4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결혼이 프랑스에 ‘식탁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데려온 요리사들이 양파 수프, 슈크림, 마카롱 등 새로운 요리를 프랑스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시금치도 카트린이 가져온 식재료로, 오늘날 시금치가 들어간 프랑스 요리에는 대부분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피렌체식’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대문호 발자크가 제과점을 소유하고 있었고, ‘삼총사’를 쓴 알렉상드르 뒤마가 요리대사전을 집필했다는 사실 등 프랑스 미식가들에 대한 ‘깨알 상식’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