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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일본인

쓰노 가이타로 지음|임경택 옮김|마음산책|280쪽|1만7500원

시작은 신문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76년 일본, 교육자이자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17편짜리 책 ‘학문의 권장’이 340만부 팔렸다. 국민 160명 중 1명이 읽었을 만큼 초베스트셀러였다. “교양이 있어야만 사농공상 모두가 자신의 본분을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 이 딱딱한 책이 서민들에게까지 읽히며 ‘독서 강국 일본’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신문’이라고 저자는 추론한다. 문학사학자 마에다 아이의 논문 ‘메이지 초기의 독자상’에 따르면 메이지 10년(1877년) 무렵 요미우리신문 발행 부수는 창간 3년 만에 2만5000부에 달했다. “신문 연재물을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매일 정량의 활자를 소화하는 습관을 체득했다.”

출판인이자 평론가인 저자는 일본 최초의 소설로 불리는 11세기의 ‘겐지 이야기’부터 21세기 전자책까지 일본의 독서문화사를 짚으며 ‘독서국민의 탄생’을 추적한다. 러시아 민속학자 레프 메치니코프는 ‘메이지 유신 회상’에 썼다. “인력거꾼이나 전신에 문신을 한 마부나, 찻집이나 그 어떤 가게에서도 볼 수 있는 여자들- 그들은 모두 예외 없이 손때 묻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고, 짬만 나면 그것을 탐독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처럼 많은 외국인을 놀라게 한 일본인의 독서욕과 교양에 대한 경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좇는다.

저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책을 소리 내 읽는 ‘음독(音讀)’에서 혼자 묵묵히 책을 읽는 ‘묵독(默讀)’으로의 전환을 ‘근대 독자’의 탄생으로 본다. 1900년 전후 일본인의 문해율이 90% 가까이에 이른 것도 묵독에 기여했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내밀하게 ‘속삭이는’ 소설이 번역된 영향이 크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서정적인 자연 묘사, 언문일치체를 특징으로 하는 투르게네프 소설 ‘밀회’로, 1888년 번역 소개됐다. “이러한 문장은 독자에게 높은 ‘집중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혼자서 입을 다물고 읽을 때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한 독서를 한 번이라도 체험하면 소리 높여 읽던 종래의 ‘공동의 독서’가 얼마나 조잡하고 ‘유치한’ 것이었던가를 뼈저리게 알게 된다.”

2015년 도쿄 신주쿠역에서 출근길 직장인들이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20세기 초 전철 통근족들이 늘어나면서 ‘차내 독서’가 유행했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20세기 일본엔 ‘독서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책이 대량생산되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며 자본주의적 산업으로서 출판의 구조가 성립됐다. 1923년 고단샤가 “일본어가 통하는 곳은 집집마다 국기(國旗)처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며 대중 종합지 ‘킹’을 창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백만잡지’가 탄생한다. 1926년 가이조사가 ‘현대일본문학전집’ 63권의 배본을 개시하면서 전국적인 ‘엔본(円本) 붐’이 인다. 공무원 초임이 75엔이던 시대, 장편소설 세 권이 담긴 박스를 1엔에 구입할 수 있게 해 “너 그 책 읽었니?”라는 대화가 일상에 자리 잡았다. 1930년 전후 엔본 붐 기세가 꺾이고 방대한 재고가 권당 10~30전에 떨이로 팔리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계층도 쉽게 책을 사게 한다’는 최초의 이상이 현실이 됐다. ‘부활’이나 ‘레 미제라블’이 술집 여성이나 온천 여관 여급의 흔한 읽을거리가 된 것. 1927년 염가의 소형본 ‘이와나미 문고’가 발족된 것도 ‘서적의 시대’를 부추겼다.

일본 이야기지만 전집의 시대와 문고본 시대를 모두 겪은 우리와의 연관성을 탐색하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일본 역사가 낯선 독자는 앞 부분을 건너뛰고 메이지 시대부터 읽는 것도 좋겠다. 저자는 독서 강국의 탄생 비결을 자국 내에서만 찾지 않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조선의 선진적인 활판인쇄기, 대량의 동활자와 그 주조기를 모조리 약탈해 오는 난폭한 사태가 생겨나기도 했다”면서 “1590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구텐베르크식 활판인쇄기를 들여온 것과 함께 이것이 일본인과 활판인쇄술의 최초의 만남”이라 명시한다. 디지털 혁명이 종이책을 밀어낸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 저자는 탄식하기보다는 긍정한다. “독서가 그토록 소중한 것이라면 그 매력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그것을 잃어버려보는 편이 낫다.” ‘겐지 이야기’를 탐독한 11세기 소녀 스가와라노 다카스에노무스메는 수필 ‘서재기(書齋記)’에 독서의 매력을 이렇게 적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방 안에 파묻혀 한 권 한 권 꺼내 읽어가는 그 기분, 황후의 자리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