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헌 지음 | 민음사

대운하 시대

조영헌 지음 | 민음사 | 464쪽 | 2만8000원

“유럽에 ‘대항해 시대’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대운하 시대’가 있었습니다.”

중국 근세사 전공자인 조영헌(49)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저서 ‘대운하 시대’는 “서양이 바다로 나섰던 시기에 동양은 뭘 했는가”란 세계사적 의문점을 파고드는 연구다. 우리는 15세기 말 이후 인도 항로 개척, 신대륙 항해, 세계 일주 항해 등으로 유럽 각국이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해 서세동점의 길을 연 시대를 ‘대항해 시대’라고 부른다. 반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제국이었던 중국은 문을 닫아걸고 쇠퇴했다고 인식한다. 이것은 과연 옳은가?

조 교수의 ‘대운하 시대’는 이런 인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중국은 해양 진출을 주저했지만, 18세기 말까지도 굳이 해양 진출을 하지 않아도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물적 인프라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운하(大運河)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15~18세기에 걸친 시대를 아우르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조영헌 교수가 중국 지도에서 대운하의 남쪽 끝인 항저우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서양 세력이 팽창하던 상황에서 동양이 18세기까지도 번영을 유지했던 원동력은 대운하라는 거대 유통 인프라였고, 15~18세기를 대운하 시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15세기 명나라의 목선 모형. /남강호 기자

대운하는 중국 북쪽 베이징에서 강남의 항저우까지 내륙으로 연결된 1800㎞ 길이의 인공 수로(水路)다. 많은 사람은 우리 고대사에서 그 이름이 등장했던 것을 기억한다. 7세기 초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위한 물자 유통을 목적으로 최초의 대운하 공사를 벌였지만, 결국 고구려에서의 패전과 함께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대운하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나라 이후에도 중국 역대 왕조에서 물자 유통을 위해 계속 건설되고 활용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큰 규모로 재건한 것은 명나라 영락제(재위 1402~1424) 때인 1415년에 와서였습니다.” 옌징(지금의 베이징)에 근거지를 둔 연왕(燕王)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 영락제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고, 이후 베이징은 명·청 두 왕조를 거쳐 현재의 중국 수도로 자리 잡았다. 왜 굳이 북방 변경 가까운 곳을 수도로 삼았을까. 조 교수는 “북쪽에 수도를 둠으로써 오래도록 골칫덩어리였던 북방 초원 지역까지도 통치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베이징은 물산이 풍부한 강남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대운하의 보수와 재활용’이 절실히 필요하게 됐다. 이후 1784년 청나라 건륭제가 대운하를 통해 강남 순행을 하기까지 약 370년 동안 대운하는 훌륭하게 활용됐다.

대운하

그런데 이것은 한 개별 국가의 유통망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중국은 하나의 문명권이자 작은 세계입니다. 대운하는 이 문명권에 피를 순환시켜 계속 전성기를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죠.” 땅이 넓고 물자가 많은 지대물박(地大物博)의 중국은 대운하를 통해 원활한 유통을 유지하며 균형 발전을 이룰 수 있어 ‘번영의 장기 지속’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운하는 서양의 지중해와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과 물자와 정보가 끊임없이 대운하를 통해 교류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의 차와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고 멕시코 은이 대규모로 중국에 유입되는 등 해외 교류 역시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던 것일까.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하며 교류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도 먼저 이뤄진 해양 진출이었다. 하지만 그 뒤 명나라는 정화와 관련된 기록을 없애며 그 흔적을 지웠고 다시는 해양 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정화가 환관이었기 때문에 환관의 정치적 세력을 견제했던 명나라 문신들이 그의 업적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중국이 바다를 무서워했다’는 사실이다. “왜구의 침략에 이어 총과 성경을 든 서양 세력의 진출로 인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꺼렸던 것이죠. 중국 남북의 조운(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 루트는 그 전 왕조에서는 대운하와 바닷길을 함께 활용했지만, 명나라는 이것을 대운하로 일원화했습니다.” 이것은 “정화 항해의 역사를 되살리며 다시 바다로 진출하겠다는 현재 중국의 ‘해양 굴기’가 허구에 바탕을 둔 구호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는 말했다.

대운하는 중국과 인접한 조선왕조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열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바다를 통한 교류를 거의 걸어 잠그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에만 몰두했는데도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대운하라는 거대 시스템의 덕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더욱 시야를 넓힌 다음 연구서 ‘대운하 시대와 대항해 시대’(가제)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