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설혜심 연세대 교수의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280쪽|1만7000원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꼽히지만 학계는 냉담했다. 크리스티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던 이유로 “미치거나, 흥미로운 연인들을 두었거나, 사생아를 가졌거나, 자살을 시도했거나, 혹은 궁핍하게 죽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그랜드 투어’ ‘인삼의 세계사’ 등 다양한 인문 교양서를 집필해 온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영국사)가 어린 시절 읽었던 빨간색 해문출판사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다시 꺼냈다. 크리스티 작품을 사료로 삼아 탐정, 독약, 집 등 16개 키워드로 전간기(戰間期, 제1차 대전 종결 후부터 제2차 대전 발발까지의 시기) 영국 사회를 읽어낸다. 설 교수는 “크리스티는 1차 대전과 스페인 독감이라는 암울한 시기를 생활인으로서 꿋꿋하게 이겨냈다. ‘악의 평범성’을 탐구하며 피폐한 전후(戰後) 사회를 위안했다.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크리스티가 위로가 되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휴머니스트 드라마 속 에르퀼 푸아로(오른쪽)와 아서 헤이스팅스.

19세기에 탄생한 셜록 홈스는 오랫동안 이상적인 영국 남성상이었다. 크리스티의 데뷔작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을 통해 세상에 나온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홈스와는 전혀 다른 면모다. 푸아로는 영국인이 아닌 벨기에인이며 달걀 모양의 머리에 165㎝의 키, 이상하게 살이 찐 “희극에 나온 이발사 같은 모습”이다. 강건하고 완벽해 보이는 홈스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결점투성이의 인물을 창조해낸 데에 대해 저자는 “크리스티가 일부러 홈스와 정반대의 인물, 일종의 반영웅(anti-hero)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크리스티 작품의 또 다른 인기 주인공인 할머니 탐정 제인 마플도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노처녀’인 마플은 결혼을 원하지도, 로맨스를 꿈꾸지도 않는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여성적 직관과 감정’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고 상황을 꿰뚫어본다.

저자는 “영국에서는 전간기를 ‘추리소설의 황금기’로 보는데 이 황금기를 이끌었던 대표 주자로 세 명의 여성 작가, 즉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 도러시 세이어스를 꼽는다”고 말한다. 추리소설의 황금기는 곧 ‘셜록 홈스와 결별한 순간’이기도 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심신이 망가진 남성들에게 홈스와 같은 완벽한 영웅상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거친 바깥세상이 아니라 안락한 가정을 무대로 삼은 ‘코지(cozy) 미스터리’물이 인기를 끌게 됐다. 이런 추리물들은 유혈이 낭자하는 살인보다는 깔끔한 독살을 선호했다. ‘푸른 열차의 죽음’에서 푸아로는 기차에서 만난 캐서린 그레이가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런 책이 왜 잘 팔릴까요?” 묻는다. 캐서린은 답한다. “사람들에게 흥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겠죠.”

1946년 집필 중인 애거서 크리스티. 설혜심 교수는 크리스티에 대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도 돈을 좋아하고, 코즈모폴리턴을 표방하면서도 지독한 영국 우월자”라 분석했다. /휴머니스트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할로 저택의 비극’ 등 크리스티의 작품엔 유난히 ‘집’이 많이 나온다. 크리스티는 오늘날 기준으로 ‘부동산 투기꾼’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집을 많이 사고팔았다. “집 보러 다니는 일은 언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다”라고 자서전에 쓸 정도였다. 2차 대전 직전 런던에 여덟 채나 되는 집을 소유했으며, 훗날 큰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저자는 이를 “발 딛는 곳 어디에나 집을 짓고 보는 영국인의 집에 대한 집착”으로 해석한다. 황폐한 집을 지키려는 주인공이 나오는 ‘엔드하우스의 비극’에서 푸아로는 “아무리 낡아빠진 집이라도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양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큰 저택들은 군에 징발돼 병원이나 장교 숙소로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무분별한 개조가 이루어진다. ‘쥐덫’에 등장하는 보일 부인은 전쟁 중 징발된 집이 망가져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아지는데 여기엔 크리스티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다. 2차 대전 때 크리스티는 자신의 저택을 미국 해안경비대 숙소로 내주었다. 전쟁 후 집으로 돌아갔더니 미군이 식료품 저장실 자리에 열네 개나 되는 화장실을 설치해 놓았다. 그는 해군본부와 크게 싸움을 벌인 끝에 화장실 철거 비용을 받아낼 수 있었다.

지루한 연대표 없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역사의 퍼즐을 꿰맞출 수 있도록 쓰인 책이다. 크리스티 작품의 ‘중급반’ 이상 독자라면 지적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웅덩이 속의 물 한 방울만큼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도 없단다”라는 마플의 말을 인용하며 미시사(微視史) 개념을 설명한다. “크리스티가 소설 속에 녹여 놓은 ‘영원한 영국’을 이제는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제안하며 제국주의적 색채에 대한 비판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