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조지 지음|김정아 옮김|한빛비즈

5리터의 피

로즈 조지 지음|김정아 옮김|한빛비즈|492쪽|2만5000원

한국인은 누구나 자신의 혈액형을 안다. 몸에 5L 안팎의 피가 흐른다는 것도 안다. 헌혈도 수혈도 익숙한 의료 행위다. 그러나 ‘피’에 대해서 정작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가 책에 썼던 간단한 질문을 반복해본다. “피는 어디서 만들어질까.” 정답은 주로 뼈(골수)에서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비장(지라), 췌장, 심장 등이라 답했다. 질문을 던졌을 때 누구 하나 확실하게 답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썼다.

전작 ‘똥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진지하게’(카라칼)에서 런던 하수도와 중국 공중화장실 등을 답사하며 분변의 모든 것을 유쾌하게 소개했던 저자가 ‘피’로 돌아왔다. 가디언과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기고해왔던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는 역사, 과학, 취재, 에세이가 뒤섞인 이 책에서 자신의 재능을 200% 발휘한다.

현대인 관점에서는 당황스럽지만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인간은 피를 넣기보다 뽑는 쪽을 선호했다. 대표적인 것이 기원전부터 이뤄진 사혈(瀉血) 요법이다. 거머리를 이용해 피를 뽑았는데, 바빌론에서 거머리는 치유의 여신의 딸로 묘사됐을 정도다. 영국 시인 바이런은 거머리 요법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거머리는 의료 현장에서 활용된다. 거머리가 내뿜는 ‘항응혈(피가 굳지 않게 하는)’ 성분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피가 굳어버리면 괴사할 조직에 의료용 거머리를 써서 계속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이다. “거머리는 손가락·귀·젖꼭지·음경 등의 접합 수술, 구개열, 유방 재건술에 효과가 있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인간은 피를 넣기보다 뽑는 쪽을 선호했다. 수혈은 20세기 들어서야 널리 퍼졌다. 이제 지구에서 3초마다 누군가는 낯선 사람의 피를 받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러나 사혈의 시대는 갔고 수혈의 시대가 왔다. 세계 어딘가에서 3초마다 누군가는 낯선 사람의 피를 받는다. 176국의 헌혈센터 1만3282곳에서 해마다 1억1000만 명이 헌혈한다. 그러나 수혈이 지금처럼 안전한 의료행위가 되기까지는 무수한 피가 흘렀다. 1901년 ABO 혈액형 분류법이 나오기 전까지 무수한 사람이 부적절한 혈액형의 피를 수혈받고 숨졌다. 수혈이 본격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차 대전 덕이었다. 서부전선에서 수많은 부상병이 수혈로 목숨을 건졌다. 몸 밖으로 나오면 응고하는 피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법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고안됐다. 카탈루냐 지방의 의사가 피에 구연산나트륨을 섞으면 응고를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피를 사고파는 것이 금지된 한국에서 매혈(賣血)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 속에서나 벌어질 일 같지만, 매혈은 20세기 미국에서도 이뤄졌다. 저자는 “대공황 시기 매혈은 지속가능한 산업 중 하나였다”고 한다. 뉴욕 병원은 약 500mL에 100달러를 줬다. 프랑스에서는 피 200mL가 100프랑에 팔렸다. 건강이 상할 정도로 피를 파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미국 볼티모어는 매혈자가 한 해 팔 수 있는 피를 1.14L로 제한하기도 했다.

흡혈귀는 없지만 흡혈인은 있었다. 2000년 전 로마에서 뇌전증(간질) 환자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검투사에게 달려갔다. 따뜻하고 신선한 피가 간질을 치유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피를 대체할 것은 아직 없다. 저자는 “17세기에 피가 순환하는 액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온갖 액체로 피를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동물 피는 물론, 포도주와 우유도 실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저자는 인공 혈액은 만들기 어려워 ‘성배’라고 불릴 정도라고 썼다. 21세기도 ‘피에는 피’뿐이라는 것이다.

‘피’에 대한 섬뜩한 취재기이자 유쾌한 잡학사전이다. 혈액형, 수혈, 사혈 같은 과학적인 이야기, 매혈, 혈액형 심리학 같은 사회적 행위, 괴테와 호메로스를 오가는 인문학적 접근이 한데 묶였다. 피를 소재로 한데 묶인 꼭지들이 다소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다.

책을 덮고 나면 눈을 감게 된다. 심장에 귀를 기울인다. 1분마다 평균 75번 뛰며 5~6L 분량의 혈액을 뿜어낸다고 한다. 그 힘으로 30조에 달하는 핏속의 적혈구는 하루에 약 1만9000㎞를 몸속에서 내달린다. 지구 반 바퀴 거리다. 살아있음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피는 매우 특별한 음료’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