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앵거스 디턴·앤 케이스 지음|이진원 옮김|한국경제신문|448쪽|2만2000원

지난 한 세기 동안 평균적으로 봤을 때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기대 수명이 늘어났고, 가처분소득도 늘어났으며, 지구는 더 평화로워졌다. ‘팩트풀니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같은 잘 알려진 책들이 이런 입장을 지지했다. 이 책의 저자이자 2015년 ‘소비, 빈곤, 복지에 관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는 2013년 쓴 ‘위대한 탈출’에서 자본주의와 세계화 덕에 인류가 250년 전보다 진보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에 역행하는 수치가 나왔다. 미국인의 기대 수명이 2014년부터 3년 동안 줄어든 것이다. 디턴은 역시나 경제학자인 아내 앤 케이스와 함께 ‘절망사(絶望死)’를 기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한다. 절망사는 자살, 약물 과다 복용, 알코올성 간 질환이라는 세 요인에 따른 죽음을 뜻한다. 1999년부터 2017년까지 발생한 절망 사망자는 60만명, 2017년에만 15만8000명이 절망사했다. 저자들은 45~54세 저학력 중년 백인의 절망사에 주목한다. 이 집단에서 인구 10만명당 절망사는 1990년 30명에서 2017년 92명이 돼 3배로 뛰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약물과 술에서 위안을 찾다 죽음에 이르는 경향은 교육 수준이 낮은 집단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왜 절망했을까. 우선 밥벌이가 힘들어졌다.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대졸 이상 노동자들의 소득은 고졸 노동자보다 40% 높았지만 2000년에 이 비율은 두 배(80%)가 됐다. 소득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뜻이다. 저숙련 노동자 몫으로 남아있던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경제력과 함께 혼인율도 추락했다. 가족과 공동체, 종교 등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안전 고리가 사라졌다.

술·마약 등에 의지하다가 중독에 빠져 목숨을 잃거나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저학력 미국 백인 중년층이 갈수록 늘고 있다. 저자들은 이런 ‘절망사’를 극복하려면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이들을 감싸 안는 ‘더 나은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저자들은 앞으로 절망사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대학 입시로 대표되는 ‘능력주의’ 때문이다. 미국 고학력자들은 대학에서 얻은 지식으로 부를 쌓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한편, 자식들에게도 좋은 교육을 받도록 해 사회적 계층을 대물림한다. 엘리트 계층 진입이 막힌 고졸 이하의 삶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능력주의가 강화되면서 승자는 더 큰 보상을, 패자는 더 큰 벌칙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불평등한 미국에서 능력주의의 부흥은 ‘승자 독식’에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1970년대 이후 (부의) 에스컬레이터는 하나에서 두 개가 됐는데, 하나는 멈췄다”고 말한다. 엘리트 계층은 더 빠르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빠른 에스컬레이터를 탔고, 가난한 사람들은 느려 터진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했다. 이제는 느려 터졌던 에스컬레이터가 아예 멈췄다는 것이다.

‘화이트 트래시(쓰레기 백인)’라고 하는 저학력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JD 밴스는 자신의 경험을 베스트셀러 ‘힐빌리의 노래’에 담았다. 디턴과 케이스는 ‘힐빌리의 노래'에서 개인적 측면을 덜어내고 경제·보건 통계를 넣어 미국 사회의 전모를 그리려 시도한다. 밴스에게 탈출구는 대학·로스쿨 진학이었다. 디턴과 케이스는 모두가 ‘고학력’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시스템적 해법을 제안한다.

저자들은 ‘더 나은 자본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페이스북·구글 같은 독과점 기업이 개인 정보를 활용할 때 비용을 내도록 하고, 기업 독과점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미국 좌파가 지지하는 부자 증세, 기본 소득 등은 효과가 불분명하다며 반대한다.

절망사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닐까. 한국은 대졸자 비율도 미국보다 월등히 높고 알코올·약물중독 문제는 상대적으로 경미하다. 그러나 저자들은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디턴과 케이스는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자살자 수는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사회적 격변은 미국의 절망사와 한국의 자살 모두의 근본적 원인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변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낸 국가지만 그런 변화의 이면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안식처로부터 단절되고 있을 수 있다.” 한국은 2019년 OECD 평균 자살률(10만명당 11.3명)의 2배 이상인 24.6명을 기록해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을 얻었다. 절망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