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마스크에 빼앗긴 여름이지만 휴가철을 맞아 설레는 마음마저 숨길 수는 없다. 떠나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휴가지에서처럼 가뿐하게. 전국 방방곡곡 동네 책방에서 보내온 책 이야기를 소개한다. 간담 서늘해지는 심리극인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독서에 대한 열정을 담은 ‘빈센트가 사랑한 책’, 제주 해녀들의 굴곡진 삶을 그린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까지…. 서울·제주·속초·통영·구미의 책방지기들이 권하는 ‘여름 휴가 책’을 읽으며 갈피마다 피어오르는 푸른 바다와 싱그러운 숲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제주] 정보배 제주 보배책방 대표
도어|서보 머그더 지음|김보국 옮김|프시케의숲|372쪽|1만5000원
해녀들의 섬|리사 시 지음|이미선 옮김|북레시피|540쪽|1만7000원
나는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를 끝까지 붙잡고 놔주지 않는 책을 만날 확률도 떨어진다. ‘도어’와 ‘해녀들의 섬’은 두 권 모두 코로나19가 우리의 생활을 장악한 작년 봄, 온라인 수업에 아이도 나도 적응하기 바빴던 그때 읽었다. 집 안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있던 시간들 사이에 이 책들이 나를 붙잡았다.
두 권 모두 밀도가 높아 한 번에 끝까지 읽어내기 쉽지 않았다. ‘도어’의 책 뒤 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소설 속 ‘나’와 집안일을 돌봐주러 온 에메렌츠, “두 여성 사이의 긴장은 매혹적”이다. 인물 간의 긴장은 물론이고, 에메렌츠가 저 ‘문(도어)’ 너머로 사람들을 들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계속 읽게 된다. 이 책 덕에 헝가리의 20세기 역사를 알고 싶어졌고, 사랑의 범주가 얼마나 넓은지 새삼 깨닫게 됐다.
‘해녀들의 섬’을 소개할 때 나는 소설적 재미와 함께 제주의 근현대사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제주의 해녀들을 주인공으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니! 해방 전 제주 동쪽 하도리의 애기 해녀 둘. 영숙에게 미자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나 떠올리기조차 싫은 사람이 된다. 평생 묻어둔 기억을 건드리는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잔인한 역사 속에 뒤엉킨 그녀들이 안타깝고 처연해 책을 잠깐 덮기도 했다. 영숙과 미자가 상군 해녀가 되는 과정에서 해녀들이 보여주는 우정과 강인함, 그리고 체념도 단순한 희망도 아닌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는 생명력이 아름답다.
한여름 어느 장소건 어느 때건 이 책들을 잡아 보라. 차가운 눈과 바닷물이 머릿속을 달궜다가 시원하게 식혀줄 것이다.
[속초] 김영건 속초 동아서점 대표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김성곤 옮김|비채|240쪽|1만3000원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지음|창비|152쪽|9000원
휴가지에서 읽을 책은 내용이 짧아야 한다고 믿는다. 기분 좋게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카페에서 누리는 잠깐의 휴식 중에, 늦은 밤 낯선 침대에 누웠을 때. 책에도 티피오가 있다면, 바로 그런 여행의 틈새가 아닐까.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2~3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무 장이나 펼쳐 읽어도 문제될 게 없다. 소설 같기도 산문 같기도 한 이 책은 1960년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62편의 짧고 쓸쓸하고 웃긴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상하게도 캘리포니아는 다른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서는 예전의 삶을 잊어버리게 한다.”(34쪽) 작가 특유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유머와 통찰로 응축된 문장이 즉흥 연주를 생각나게 한다.
여름이 왔는데도 겨울 같은 손님이 있다. 그는 고개를 내린 채 우두커니 책 앞에 서 있는데, 꼭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모두가 새의 황금빛을 이야기할 때/죽은 듯이라는 말을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쓰는 사람”(74쪽,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처럼. 여름에 그런 손님을 마주하면 나는 이 시집을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아둔다. 안희연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슬픔을 견디는 마음과 슬픔 이후에도 별수 없이 지속되는 나날을 담은 시집이다. 누군가의 여름은 즐기는 것이지만 당신의 여름이 버티는 것이라면, 이 책에 적힌 노래가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134쪽, ‘열과’).
[통영] 이다석, 황지영 통영 ‘봄날의책방’ 책방지기
어떤 배움은 떠나야만 가능하다|김우인 지음|열매하나|228쪽|1만4000원
빈센트가 사랑한 책|마리엘라 구쪼니 지음|김한영 옮김|이유출판|232쪽|2만9000원
통영에 자리한 봄날의책방이 추천하는 첫 책은 순천의 열매하나 출판사가 펴내고 우리 책방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어떤 배움은 떠나야만 가능하다’이다. 대안학교 청년 교사의 세계 생태마을 순례기다. 10년에 걸쳐 유럽의 6개 생태마을과 공동체를 다니며 남긴 기록은 교육 불평등, 기후 위기,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 등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연과 더불어 생명을 돌보며 지구 위에 새로운 지도를 그려 나간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공동의 가치는 무엇인지 결코 작지 않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한다.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쩌면 이 작은 책에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빈센트가 사랑한 책’은 광기 어린 천재성 이면에 숨겨진 빈센트 반 고흐의 색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인생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빈센트가 선택한 방법은 방대한 독서였다. 그가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200명 넘는 작가의 이름이 나온다. 책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열정이 자신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던 그는 끊임없이 책을 읽었고, 책 속의 또 다른 예술가와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이 책은 반 고흐 작품의 철학적·문화적 배경을 그가 읽은 무수한 책들을 매개로 풀어나간다. 당대의 문학과 회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통합한 빈센트의 독특한 면모를 풍부한 시각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혼돈의 시대에 천재 화가 빈센트가 책에서 찾은 길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여러분도 꼭 만나보시길 바란다.
[구미] 김기중 구미 삼일문고 대표
완전한 행복|정유정 지음|은행나무|524쪽|1만5800원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심너울 지음|아작|344쪽|1만4800원
무더운 여름이면 긴 낮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스릴러거나, 불쾌지수를 낮춰 줄 재미있는 이야기. 각각의 요건을 충족하는 이 책 두 권은 무사히 여름날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온통 차갑고 시원한 것들을 찾게 되는 여름,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은 이런 이유로 그를 찾는 독자들의 기대를 다시 한번 충족하며 서늘한 이야기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완전한 행복’은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완전한 행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의 행복과 욕망을 위해 타인의 행복과 삶을 파괴하는 극단적이고 잔인한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가 가진 행복에 대한 강박과 욕망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멈출 수 없게 만드는 흡입력과 섬뜩함은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까지 단숨에 끌어다 놓는다.
한번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을 가진 책들이 있다. 심너울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가 그랬다. 제목에 이끌려 첫 페이지를 넘기고 “진짜 퇴근하고 싶다”는 첫 문장을 읽은 뒤로는 정말로 이 책을 지나칠 수 없게 됐다.
SF 소설집이지만 배경지식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현실과 가깝고 공감하기 쉬운 소재들로 쓰였다. 현실을 비트는 풍자와 거침없는 표현은 냉소와 웃음의 경계를 정신없이 오가게 하고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터지는 웃음 뒤로 씁쓸한 끝 맛을 선사한다.
[서울] 박훌륭 서울 ‘아직 독립 못 한 책방’ 대표 겸 약사
파우스터|김호연 지음|위즈덤하우스|544쪽|1만6800원
다독이는 밤|강가희 지음|책밥|296쪽|1만5000원
생각보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와서 마음은 이미 휴가를 떠났다. 코로나로 인해 운신의 폭이 줄어든 요즘,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계곡에 앉아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마음으로 선풍기를 미풍 모드에 맞춰두고 책 한 권 읽어보는 건 어떨까? 명색이 여름 휴가인데 어렵고 복잡한 책은 나도 싫다. 흥미진진한 책 두 권을 뽑아봤다.
스토리 전개의 마법사인 김호연 작가의 ‘파우스터’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한 회사는 은퇴한 부호들을 회원으로 모집해 능력과 꿈은 있지만 가난한 젊은이들과 ‘헬멧’을 통해 연결시킨다. 노인들은 젊은이의 삶을 그대로 느끼고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할 수 있다. 주인공인 준석은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국내 최고의 투수. 그러나 사실 법관 출신인 태근이 ‘파우스터’ 시스템을 통해 준석을 조종하고 있었다. 결국 준석의 의도라고 생각했던 삶은 태근이 원하는 삶이었던 것.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대반전. 눈을 뗄 수 없다.
방송 작가 출신인 강가희 작가의 ‘다독(多讀)이는 밤’은 위로와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책이다. ‘안부’ ‘사랑’ ‘외로움’ ‘위로’의 4가지 테마로 카뮈·서머싯 몸·피츠제럴드·가즈오 이시구로·박완서·김애란 등 국내외 작가의 책 서른 두 권에서 ‘다독이는 한 줄’을 뽑았다. 그리고 이 ‘한 줄’에 관한 사유와 작가의 경험을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고전에 약한 이든, 한국 소설을 멀리했던 이든 이 책과 함께라면 한 문장을 시작으로 위로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