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허블|264쪽|1만3000원
이런 상상을 해보자. 미래에 우주에서 지구와 완전히 똑같은 행성을 발견한다면? 태양계뿐 아니라 대기와 지질, 기후와 생물까지 완전히 동일한 도플갱어 행성. 그런데 지구보다 50만년 늦게 탄생했다. 그림으로만 봤던 멸종한 매머드가, 유인원에서 호모 속(屬)으로 막 갈라져 나온 초기 인류가 그곳에 있다. 인간들은 무엇을 할까? “인류는 지구의 과거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쌍둥이지구 여행길에 나섰다.”
단편 ‘행성사파리’에서 12세 소녀 미아는 웜홀을 통한 우주선 여행이 허가되자마자 쌍둥이지구행 단체 관광에 몸을 싣는다. 어릴 때 인형으로 갖고 놀던 매머드를 실제로 보기 위해서다. 인류가 정한 관광법이 있다. 그 어떤 생물과도 교류하지 않는 ‘생태계 무개입 원칙’. 쌍둥이지구 종의 자연 진화를 보존하고, 대형 포유류를 사냥하는 몇몇 인간들의 악행을 막기 위해서다.
미아는 메머드를 보고 감격한다. 다음 코스는 인류의 조상 살펴보기. 해변에 비행기를 내리자 초기 인류 ‘해변의 인간’이 보인다. 이들은 나무껍질을 서핑 보드 삼아 파도를 타는 유희를 즐기고 있다. 인근 해저 화산이 폭발하면서 쓰나미 경보가 울린다. 탈출하려는 우주선에 해변의 인간 어미가 자식을 안고 달려온다. “이 사람들은 어쩌고요! 이대로 두면 다들 끝장이에요.” 다른 관광객이 쏘아붙인다. “사람들이라니, 저들이 어떻게 사람이야?” 원칙에 따라 우주선은 관광객만 싣고 현장을 빠져나온다. 슬퍼하는 미아를 가이드는 위로한다. “생물의 진화가 완벽하게 무계획인 것처럼, 행성의 일생 역시 아무리 주어진 조건이 기적처럼 동일해도 알 수 없어요.” 그렇게 미아는 아무리 똑같이 생겼더라도 개개의 삶은 모두 고유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지구로 귀환한다. 미아의 부모는 사망한 큰딸의 유전자를 복제해 그를 낳았다.
미래의 이야기로 현재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과학 소설집. 안락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로봇과 교감하며 존엄한 죽음을 고민하는 인간(마지막 로그), 화성으로 이주해서도 명절과 제사를 고민하는 현실(분향) 등 작가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쌓은 단단한 가정법 위에 인물을 올려 놓는다. 한계가 없는 무대에 뛰노는 배우를 관찰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