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가 망했는데 왜 ‘자본’을 읽어야 하냐고? ‘자본’을 이념 서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회학적, 정치학적 분석이기도 하다. ‘자본’에는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자본’이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이다.”(철학자 고병권)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자본’(1867)은 누구나 이름을 아는 책이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한때는 불온 서적 취급당했고, 지금은 낡은 이론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화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 대표를 지내기도 한 철학자 고병권(50)씨가 ‘자본’을 최대한 쉬운 말로 풀이해 쓴 ‘북클럽 자본’(천년의상상) 시리즈 12권이 2년 8개월 만에 완간됐다. 프로젝트의 주역 네 사람을 최근 만났다. 고병권, 선완규(55) 천년의상상 대표, 편집자 남미은(50)씨, 디자이너 심우진(45) 산돌연구소장 등이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속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물고기가 물을 보고 놀라는 것처럼 ‘뭔가 이상하다’ 의문을 가졌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기술은 극도로 발전하는데 내 일자리는 불안할 때, 사람들이 ‘가치’에 대한 숙고 없이 ‘영끌’해 집 사고 주식에 투자할 때 생각한다. ‘세상이 왜 이런 거지?’ 그럴 때 마르크스가 소환되는 것 같다.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본이란 뭘까’ 궁금하기 때문에. 고병권씨는 “‘자본'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저지른 범죄를 추적하는 책”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자기를 증식해가는 가치”라고 ‘자본’을 정의했다.
‘북클럽 자본’ 프로젝트는 2018년 8월 첫 권 ‘다시 자본을 읽자’가 발간되며 두 달에 한 권씩 책을 내는 것을 목표로 시작됐다. 출판사 입장에서 대중적이지 않은 책을 내는 건 모험이었지만 선완규 대표는 “권당 1500~2000부만 소화되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본’이 우리말로 나온 지 30년밖에 안 됐다.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시대를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결과는 고무적이다. 1~9권이 이미 권당 1500부 넘게 팔렸다. 주 독자층은 40~50대. 두 달에 한 권씩 내자는 아이디어는 남미은씨가 냈다. “2017년 ‘월간 윤종신’이 유행하길래 우리도 색다른 기획을 해보고 싶었다. 막상 시작하고 나서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첫 1년은 꾸준히 했다(웃음)” 완성된 시리즈는 흰 바탕에 검정 제목. 심우진 소장은 “색에 대한 욕심에 과하게 하려다 보면 환경도 사회도 망가진다 생각했다. 편집부에서 난색을 표해 띠지에는 색을 넣는 걸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고병권씨는 “많은 이들이 ‘자본’에 ‘공산당 선언'이 있는 줄 알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역사를 관통하는 법칙이 아니라 모든 시대는 자기 법칙을 갖는다는 걸 발견했다. 다만 ‘자본’이 나온 19세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기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생존하기 힘들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코로나로 모든 것이 잠깐 멈춘 시기, ‘자본’을 읽으며 ‘세상이 대체 왜 이렇게 된거지?’라는 물음을 던질 때가 됐다.” 1872년 프랑스어판을 낼 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 대한 격려를 담아 서문에 썼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오르는 사람만이 학문의 그 빛나는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