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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 머문 날들|W. G. 제발트 지음|이경진 옮김|문학동네|288쪽|1만5000원
소설 ‘이민자들’ ‘아우스터리츠’ 등으로 독일을 넘어 세계 문학의 거장 반열에 오른 W. G. 제발트(1944~2001)가 1998년 펴낸 에세이.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준 여섯 작가 요한 페터 헤벨,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장 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뫼리케, 얀 페터 트리프에 대해 쓴 비평집이자 헌사다.
‘전원’은 여섯 작가를 묶는 키워드다. 소란스러운 중심에서 떨어져 있는 전원은 어떤 일을 도모하거나 황폐한 심신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스위스와 독일 서남부 출신의 이 작가들은 고향의 지리적 위치처럼 문학사의 변방에 머무르며 빛나는 왕좌에 앉지 못했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중략)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 시대와 불화하고 우울로 고통받았던 글쟁이들이 경계 바깥에서 피워낸 작품들은 그러나 끊임없이 반짝이며 독자와 후배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발저(1878~1956)는 말년에 문학을 등지고 정신병원에서 기거했지만, 여전히 조끼 호주머니 속에 몽당연필과 메모지를 넣고 다녔다. 1mm 크기의 글씨로 쓴 유고 뭉치는 1980년부터 이뤄진 해독 작업 끝에 2000년까지 책들로 묶였다. 덕분에 세상에 나온 소설 ‘강도’를 읽던 제발트는 단어 ‘슬픔의 이력’을 발견하자 놀란다. 당시 자기 작품을 쓰면서 그 누구도 이 단어를 생각해낸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세상으로 간 동료에게 추모의 표시를 하자 그 신호를 되돌려받은 것 같았다.”
제발트는 작가들의 개인사와 자신의 경험을 오가면서 작품을 인용하고 감상을 붙인다. 행갈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빽빽한 원고 속 만연체 문장이 꿈틀대며 대상 작가의 전모를 빚어내는데, 그 솜씨가 너무도 능수능란해 한 문학 작품으로 읽힌다. 그림과 사진들은 대가의 굽이치는 사유를 따라가다 잠시 숨 돌릴 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