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씨앗 창고
캐리 파울러 글|마리 테프레 사진|허형은 옮김|마농지|176쪽|2만5000원
북위 74~81도.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는 인간의 거주지 가운데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겨울엔 밤만 계속되는 극야(極夜). 여름엔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 세계 최북단 유치원이 ‘북극곰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세계 유일의 유치원’임을 자부하는 곳.
이곳 어느 바위산의 영구 동토층에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가 있다. 전쟁, 테러, 기후변화 같은 위기를 피해 식량 작물을 보존하려고 전 세계 종자 샘플을 5억개 이상 보관한 곳이다. 미국의 농학자로 저장고 건립을 주도한 저자가 평소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독자들을 안내한다. 식물의 생육에 가장 불리한 장소가 식량 작물 종(種) 다양성의 최후 보루 구실을 하는 역설의 현장이다.
저장고에는 식량·농업 관련 작물의 표본만 보관한다. 쌀과 밀만 각각 15만 종류가 넘는다. 다양성이 중요한 건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 조건에 작물 품종들이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다.
이곳은 ‘종말의 날 저장고’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지만 저자는 그런 명칭에 찬동하지 않는다. 저장고는 세계 종말이라는 비관적 전망보다 “꺾이지 않는 낙관주의”에 바탕을 두고 지었기 때문이다. “지구적인 문제, 엄청나게 심각한 어떤 문제라도 신뢰와 선의, 협력과 끈기로 풀어나갈 수 있다.”
이런 시설은 어떤 미적 고려도 없이 살풍경할 것만 같지만 저장고 입구엔 특수 유리로 만든 조명 작품이 설치돼 있다. 북극의 찬 공기 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초록빛은 긍정과 낙관을 상징한다. 작가인 노르웨이 예술가 뒤베케 산네는 “인류를 이끄는 등대의 불빛”으로 표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