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산책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의 저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오현아 옮김|마음산책|432쪽|1만6800원

“하와이에서는 커피가 나고, 버지니아는 땅콩. 클리블랜드에서는 뭐가 나냐고?”

클리블랜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저자도 막상 친구의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던 끝에 “실패”라고 겨우 한마디 내뱉고 만다. 듣던 친구들도 웃고, 저자도 따라서 겸연쩍게 웃는다. 하지만 뒤끝이 썩 개운하진 않았을 테다.

클리블랜드에 자랑할 만한 유산이나 산물이 없는 건 아니다. 미 동부의 ‘5대 명문 악단’으로 꼽히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미 프로야구 추신수 선수가 활약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이 우선 떠오른다. 현재 미 프로농구의 왕(King)이라는 르브론 제임스가 2003년 처음 입단한 팀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였다. 하지만 용광로에서 솟구치는 불꽃으로 5대호의 저녁 하늘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던 제철소야말로 클리블랜드의 상징이자 자랑거리다. 저자는 뒤늦게 답한다. “주황빛 불꽃은 단순히 역한 냄새와 오염의 전조만이 아니다. 그것은 일자리이고 세금이다. 그것은 경제성장을 가리킨다. 저 불꽃이 타오르면 클리블랜드가 잘 굴러간다는 뜻이야, 하고 철강 노동자들은 말한다. 저 불꽃은 우리 역사와 우리 정체성의 일부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1986년생 미 여성 영문학자의 이 책은 미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 지대에 대한 현장 보고서이자 자전적 수기다. ‘녹슨 지대’로 번역되는 러스트벨트(Rust Belt)는 20세기 미국 눈부신 경제 발전을 떠받치는 든든한 중추 역할을 했지만, 최근 제조업의 사양화로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제철소가 있던 자리에는 레스토랑 체인점과 매장이 들어선 야외 쇼핑몰이 들어섰다. 고임금의 공장 정규직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우리는 생계 수단을 중국으로 떠나보냈고, 이제는 월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중국제 이외에 다른 건 살 형편이 안 되었다”고 자조하기에 이른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한 번 더 화제가 된 ‘힐빌리의 노래’처럼, 미 산업 공동화에 따른 사회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은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차별성은 고학력 여성 장애인인 저자가 남성 노동자의 전유물로 인식됐던 제철소에 직접 들어가 일하면서 쓴 체험기라는 점에 있다. ‘힐빌리의 노래’가 지난 대선 당시 트럼프의 당선 원인으로 꼽혔던 백인 하층민의 분노를 엿볼 수 있는 단초라면, 진보적 여성주의 관점에서 쓴 이 책은 바이든이 이번 대선에서 지역 표심 탈환에 성공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대체로 백인 노동자들의 성난 모습만 부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여성 유권자나 진보적 지식인 같은 반대층을 함께 살펴야 ‘미국의 두 얼굴’을 볼 수 있다. ‘힐빌리의 노래’가 전자라면, 이 책은 후자에 해당한다. 어쩌면 두 책을 함께 읽을 때 러스트 벨트의 명암이 모두 보일지도 모른다.

당초 논픽션 연구 전공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던 저자의 꿈은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조울증)의 재발과 학자금 대출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위 취득에 실패한 뒤 저자 엘리스는 2016년 제철소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공장에서 다양한 유지 보수 작업을 맡는 ‘유틸리티 노동자 6691번’으로 불린다. 백인과 흑인, 라틴계까지 입사 동기 23명의 면면은 다양하다. 하지만 여성은 딱 3명뿐이다. 이때부터 학력과 성별, 장애라는 3중의 차이를 지닌 소수자 시선에서 제철소의 남성 노동자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제철소에는 ‘십계명’이 있다. 우선 쇳물을 물에 부어서는 안 된다. 순식간에 물이 증기로 바뀌면서 갑작스러운 압력에 금속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고된 밤 교대 근무에 지친 저자의 집에는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잠이 부족해서 종일 멍한 상태로 살아가기도 한다. 매니큐어를 바르라는 성차별과 집적거림 같은 성희롱이 만연하지만 직접 맞부딪쳐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상사에게 고자질을 일삼는 밀고자는 해코지를 당하고 파업 불참자는 먼지보다 하찮게 여기는 노동자 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3년간 일하면서 저자는 서서히 적응해간다. “제철소는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제2의 가족이자 제2의 집인 동시에 제2의 출발이었다.”

책은 제철소 근무 경험과 정신적 장애, 여성주의가 세 겹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구조적 원인 분석은 적은 대신 내면적 고백이 두드러진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그 점은 독특한 매력이나 한계로 비칠 것이다. 결국 저자는 강단으로 돌아온다. 책을 덮고 나면, 남아 있을 제철소 노동자들의 운명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