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문학동네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문학동네|236쪽|1만4500원

무라카미 하루키(71)의 최신 단편소설집 ‘일인칭 단수’가 우리말로 번역됐다.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남자의 사랑과 고독에 대해 쓴 단편 소설 여덟 편으로 구성됐다. 어느덧 고희를 넘긴 작가는 사춘기와 청년기의 사랑을 회상하는 여러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나’의 음성으로 써냈다. 개인적 삶의 신비로운 다면성(多面性)을 때로는 서정적 사소설(私小說)로, 때로는 초현실적 기담(奇談) 형식으로 그리면서 자유자재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작가는 여러 명의 화자 ‘나’를 등장시켜 저마다 청춘 시대로 돌아가게 한다. 문체는 여전히 풋풋하지만, 주인공 ‘나’의 음성엔 연륜이 짙게 배어있다. 수록작 중 ‘크림’의 화자 ‘나’는 “아무튼 내가 열여덟살이었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이다. 거의 고대사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또다른 단편 ‘위드 더 비틀스’의 화자 ‘나’는 비틀스 음악이 유행한 1964년을 회상한다. ‘나’는 학교 복도에서 비틀스 음반을 가슴에 품고 가던 여학생을 보곤 첫눈에 반했지만, 그 이후 소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헛것을 본 것인가. 당시 ‘나’는 나이가 들어선 “어둑한 학교 복도에서 실제 모습보다 미화하는 바람에, 나중에 현실의 그녀를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라고 앙증맞게 추측했다.

시간이 지나 노년에 접어든 ‘나’는 “그녀는 아직도 1964년의 그 어둑한 학교 복도를,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걷고 있을까”라며 회억(回億)에 빠진다. 이와 함께 ‘나’가 10대 시절에 잠깐 사귄 여자 친구의 추억이 펼쳐지고, 20년이 지나 뒤늦게 알려진 그녀의 자살 소식이 겹쳐진다. 비틀스 소녀와 여자 친구 모두 우연한 만남이었고, ‘나’의 삶에 큰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영원한 그 소녀들의 이미지가 느닷없이 ‘나’의 노년에 틈입하는 순간, 거역할 수 없는 노화의 서글픔이 두드러진다.

어느덧 고희를 넘긴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러 명의 ‘나’를 등장시켜 청춘 시대로 돌아간다. 나를 낯설게 되돌아보면서 지금껏 선택한 삶의 단면들을 떠올린다. /연합뉴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추억은 불완전한 기억의 일부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현상이다. 여러 명의 ‘나’는 대개 “지금부터 말하려는 건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며 말문을 열지만, 저마다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그녀들이 남긴 단가(短歌) 또는 특정 음악이나 기괴한 사건에 얽힌 기억이 ‘나’의 뇌리 속에 예술적 기호(記號)처럼 각인돼 있다가 마법의 언어처럼 울린다.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책을 통해 개인이 궁극의 고독에 이르러서야 사랑의 순수한 결정체를 음미하게 되는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는 듯하다. 젊어서 선택하지 않았거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회상 덕분에 역설적으로 생의 후반기 고독을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 추억을 통해 삶의 결락(缺落)을 뒤늦게 깨닫는 ‘나’는 자신을 낯설게 되돌아봄으로써 삶을 새롭게 인식한다. 개인은 늘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지만, 삶은 복수(複數)의 정체성을 취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책의 제목이 된 단편 ‘일인칭 단수’의 화자 ‘나’는 거울을 보면서 지금껏 선택한 삶의 단면(斷面)들을 떠올린 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누구일까”라며 낯설어한다. 다른 단편 ‘크림’에선 이상한 노인이 등장해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圓).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나?”라는 수수께끼를 독자에게 낸다.

하루키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일인칭 단수란 세계의 한 조각을 도려낸 ‘홑눈’이다”며 “그러나 그 단면이 늘어날수록 한없이 서로 얽힌 ‘겹눈’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私)는 이미 내가 아니고, 나(僕)도 이미 내가 아니다. 또한 그렇다, 당신도 더 이상 당신이 아니게 된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