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식사
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352쪽|2만원
K푸드 애호가는 19세기에도 있었다. 미 해군 소속으로 아시아 함대에 복무하며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는 1884년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해군 무관으로 임명돼 민영익의 지원으로 조선 곳곳을 누비며 여행했다. 일기에 각 지방서 먹은 것을 기록했다. 1884년 11월 10일 전주 감영에 도착한 포크는 다음 날 받은 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각 식탁 옆의 작은 식탁에는 화로가 달린 놋쇠 솥에 채소와 고기가 김을 내며 끓고 있었다. 하얀색, 갈색, 검은색, 노란색, 그리고 빨간색의 포슬포슬하고 달콤한 작은 떡을 쌓아올린 더미가 놓여 있었다. 베르미첼리(vermicelli)는 주요리다. 국화 모양의 튀긴 모찌 하나를 곁들여놓았다.”
음식인문학자이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 저자는 채소와 고기가 끓고 있는 솥은 신선로, 떡 더미는 오색 경단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스파게티보다 면발이 가는 파스타인 ‘베르미첼리’는 뭘까? “당시 조선의 왕실과 관청에서 연회 음식으로 마지막에 제공했던 메밀국수일 가능성이 크다. 요사이야 메밀국수 하면 물냉면이 떠오르겠지만, 당시 왕실 연회에 오른 메밀국수는 조선간장으로 비빈 비빔냉면이었다. 비빔냉면은 메밀국수에 여러가지 재료가 한데 섞였다는 뜻에서 골동면(骨董麵)이라고도 불렸다.”
저자는 개항, 식민지, 전쟁, 냉전, 압축 성장, 세계화라는 여섯 가지 코드를 중심으로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반까지 한국인의 식생활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추적한다. 앞의 다섯 단계를 거쳐 한반도는 세계 식품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전면화되면서 한국에서 생산된 식품과 음식이 다른 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한다고 분석한다.
결핍과 절약이 새로운 요리법을 낳기도 했다. 멸치 육수는 전시(戰時) 경제의 산물이다. 중일전쟁 이후 물자가 귀해지면서 조선총독부는 “총후(銃後)의 국민은 쌀을 절약하고 대용식(代用食)을 먹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칼슘 성분 풍부한 멸치는 소고기 대용식으로 제안됐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은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은 반면, 일본인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 육수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소고기 대신 찌개나 국에 멸치를 넣게 되면서 멸치는 점차 한국인의 상에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음식의 중요한 식재료가 됐다.
라면도 절미정책과 분식 장려의 결과물이다. 삼양식품 대표 전중윤은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멘이 유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 인스턴트 라멘 업계 2위인 묘조식품 대표 오쿠이 기요스미를 만난다. 기요스미로부터 기계와 기술 등을 지원받아 1963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즉석 삼양라면’을 출시한다. 묘조식품 라멘처럼 수프를 별도로 첨부했다. 한국인의 첫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름부터 생소했다. 옷감을 뜻하는 라면(羅棉)이라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쌀밥 위주 식생활에 익숙해 분식을 주식으로 여기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 광고와 시식 행사 등 대대적 홍보로 인식이 바뀌었다. 발매 첫해인 1963년 삼양라면 판매량은 20만 봉지였지만, 1964년 5월에는 73만 봉지로, 반년도 되지 않아 판매량이 세 배로 늘어났다.
소고기 중 특히 갈비를 선호하는 한국인의 입맛은 거품 경제가 한창이던 1980년대 절정에 달했다. 아파트값 폭등 덕에 그 어느 때보다 지갑이 든든한 강남 신흥 중산층은 휴일이면 갈비구이와 냉면을 판매하는 ‘공원식 갈빗집’에서 가족 나들이를 했다. 1000여 평 광대한 대지에 고급 관상수, 인공폭포, 구름다리, 물레방아, 정자, 석탑 등의 시설을 갖췄다. 1981년 11월 개업한 서울 신사동 삼원가든은 강남 대지주 소유의 땅 1200평을 빌리고 2억원 시설비를 들였다. 1983년 상반기 손님 수는 평일 200여 명, 휴일엔 350여 명이었다. 평일 하루 매상액은 400만~500만원, 휴일 하루 동안 1500만원의 최고 매상액을 올릴 때도 있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우리 식탁의 변화상과 절묘하게 엮었다. 소재도 재미있고 문장도 편안해 술술 읽힌다. 결말에선 코로나19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저자는 반찬을 공용으로 먹는 우리 식문화를 지적하며 “음식점에서의 1인용 상차림은 ‘비말 감염’ 문제를 해결할 방안 중 하나”라 제안한다. 곽아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