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같은 동작, 뼈를 깎아야 완성된다.
인기 걸그룹 에스파의 댄스곡 ‘넥스트 레벨’ 안무 역시 그렇게 완성됐다. 조각가 이동훈(31)씨는 이 칼군무를 위해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았다. 마치 마르셀 뒤샹의 그림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처럼, 움직임의 잔상을 하나의 덩어리에 표현하고자 팔·다리를 여러 개 달아놨다. 빗금처럼 채색한 표면이 곧 이어질 안무를 예비한다. ‘넥스트 레벨’뿐 아니라, 또 다른 걸그룹 잇지의 곡 ‘Not shy’ 역시 나무 조각이 돼 전시장에 서 있다. 관람객들이 함께 춤추며 사진을 찍는다. 작가는 “조각은 존재감이 확실한 장르”라며 “사진으로는 몰랐다가 콘서트장에 가면 느끼게 되는 전율 같은 게 있다”고 했다.
북서울미술관에서 8월 15일까지 열리는 ‘조각 충동’은 젊은 작가 17인이 참여한 흔치 않은 대규모 조각 전시다. 코로나 사태 이후 메타버스 전시가 활성화되긴 했으나, 가상으로는 체감하기 어려운 시각의 물리적 쾌감을 제공하려는 취지다. 습지(濕地)처럼 젖은 흙을 4m 높이로 쌓아놓은 위태로운 촉수 엄금 조각(김주리)부터, 안구·자궁 등 신체 기관을 옷처럼 제작한 입는 조각(우한나), 관람객의 촉각에 소리로 반응하며 관계 실험을 이어가는 만지는 조각(김채린)까지 조각의 경계를 확장하는 조각이 다채롭다.
그간 조각났던 조각의 인기는 그러나 코로나로 억제됐던 물성(物性)에 대한 그리움이 해방되며 여느 때보다 고조되는 분위기다. 서울광장 및 노들섬·한강공원 등지에서 연말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서울조각축제’ 등 각지에서 야외 전시가 잇따르고, 권진규(서울시립미술관), 문신(국립현대미술관) 등 근현대 조각 거장의 탄생 100주년 이벤트도 맞물린 여파다. 철기 미술 전문 포항시립미술관이 한국 철조각 선구자 송영수(1930~1970) 개인전을 9월 12일까지 개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류 회사 하이트진로그룹이 서울 청담동에 세운 하이트컬렉션 역시 7월 17일까지 열리는 새 기획전 주제를 ‘각’으로 잡았다. 서도호·이불·이수경 등 작가 12인의 작품에 취할 기회다. 일련의 실험 앞에서 조각이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구상(具象)이라는 편견은 허물어지는데, 이를테면 권오상(48)이 바위 사진을 인화해 이어붙인 바위 조각(‘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통해 동시대 조각의 정체성을 되묻게 되는 것이다. 파내거나 자연적으로 갈라진 나무의 얇은 홈을 드러냄으로써 근원적 공간을 사유케 하는 조각가 나점수(53)의 개인전(서울 아트스페이스3에서 7월 16일까지)도 볼거리다.
비(非)조각의 조각도 있다. 이승택(90)은 1950년대부터 근대적 조각 개념에서 벗어난 비조각의 전위성으로 나아갔다. 그 핵심에 ‘묶기’가 있다. 돌멩이 가운데를 갈아 움푹 들어가게 한 뒤 노끈으로 묶으면 돌멩이가 물풍선마냥 말랑말랑해보이는 효과가 난다. 아주 단순한 행위로 재료의 질감을 바꿔낸 것이다. 조각을 좌대에 올려놓는 관행에서 벗어나 옹기를 묶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아놓거나, 고드랫돌을 굴비처럼 엮어 벽에 걸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7월 3일까지 열리는 개인전은 그 역발상의 집대성이다. 당대는 이게 무슨 조각이냐고 힐난했으나 작가는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고 거꾸로 생각하고 거꾸로 살았지”라고 했다. 고정관념을 산산조각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