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中庭)에 햇볕이 내리쬔다. 햇볕은 천진난만한 웃음 띤 동자석(童子石)에 드리웠다가, 빼꼼히 난 작은 창을 비춘다. 창에 어리는 꽃 그림자와 물 그림자... 창문 뒤편으로 수련(睡蓮)이 핀 연못이 펼쳐진다. 진짜 연못인가 하였더니 벽에 걸린 그림.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수련이 있는 연못’이다. 누가 일군 정원일까?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구현된 풍경이다. 박물관은 이 전시를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 이름 붙이고 수집가가 관람객들을 집에 초대해 수집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지난해 4월 28일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전국 국·공립 박물관·미술관 일곱 곳에 기증한 수집품 2만3000여 점 중 355점을 한데 모았다. 선사시대 유물부터 근·현대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작품이 광주, 대구, 양구, 제주 등 전국 방방곡곡서 총출동했다.
◇모네와 정선이 한자리에
이번 전시의 ‘수퍼스타’는 단연 모네의 유화 ‘수련이 있는 연못’.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최초 공개된다. 가로 2m, 세로 1m가량의 대작. 말년의 모네는 눈이 거의 멀어서 형태를 또렷이 보지 못했지만, 흐릿하나마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색과 형태를 눈에 보이는 대로 화폭에 옮기는 것은 모네가 창시한 인상주의의 강령이기도 했다.
인상주의와 조선시대 명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서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을 붙들었던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가 이번에도 나온다. 그렇지만 이 두 작품을 함께 알현할 수 있는 기회는 5월 31일까지 딱 한 달. 박물관 측은 “빛에 쉽게 손상되는 고서화를 보호하기 위해 김홍도의 ‘추성부도’, 박대성의 ‘불국설경’, 남계우의 ‘나비’ 등으로 차례차례 교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약용이 전하는 가족애
5월은 가정의 달. 관람객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전시실은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 있는 작품들로 꾸몄다. 그 중심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있다.
강진 사람 정여주가 서른 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그 애끊는 마음을 다산에게 전해 죽은 아들의 효행을 글로 써 달라 했다. 정여주의 자식 사랑은 홀로 된 며느리에게도 미쳤다. 며느리가 아비 잃은 자식을 엄하게 키우는 마음을 높이 사, 이 이야기 또한 다산에게 적어달라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정효자전(鄭孝子傳)’과 ‘정부인전(鄭婦人傳)’이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다산의 글씨는 가족에게 쓴 편지를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편지는 대부분 흘려 쓴 글씨다. 반면 이 두 작품에선 다산 필치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이 밖에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그림으로 자신의 근황을 전한 ‘판잣집 화실’, 장욱진의 ‘가족’ 등도 나왔다.
◇전시실을 가득 채운 茶香
전시의 대주제는 인간, 자연, 물건. 각 시대의 화가들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감지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마지막 전시실에 중점적으로 배치했다. 박수근의 ‘한일(閑日)’은 1950년대 길가에 앉아 장기 두는 사람들의 모습을 둥근 형태, 투박한 질감으로 그린 작품.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한 길거리의 인물들은 박수근의 화폭에서 비로소 주인공이 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모으는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조선시대 수집가의 방을 재현한 전시실에 들러보길 권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책장에 책, 문방구, 귀한 그릇 등이 놓인 모습을 그린 ‘책가도’에 자신들이 수집하고픈 물건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이 방에 입장하기 전 응접실 역할을 하는 중정엔 차향(茶香)이 그득하다. 이는 관람객에 대한 배려가 현대기술과 만나 이루어낸 성과.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은 “손님을 초대했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찻잎을 덖어 훈증기를 통해 향기가 전시실을 채우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람 요령]
거리 두기 해제로 관람 기회가 대폭 늘어났다. 30분 간격으로 월, 화, 목, 금, 일요일은 총 15회차, 수, 토요일은 21회차 입장이 가능하다. 회차당 100명. 인터파크 온라인 예매가 70명이고 현장 발권 30명이다. 성인 5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