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거울은 진실하지만 때론 거짓되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라는 건 관념일 뿐. 반영(反映)되는 순간부터 좌우가 이미 전복돼 있다. 편평한 판을 조금만 변형시켜도 확연히 왜곡되고 뒤틀린 형상이 맺히곤 한다. 착시의 원형을 파고 들면 그 중 거울의 역할도 상당할 것이다. 구찌를 ‘지금의’ 구찌로 변화시킨 패션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이러한 거울의 본질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자신만의 거울을 통해 사회를 비춘다. 거울 속 투사된 이미지는 미켈레의 상상력을 구동하는 엔진이 된다. 2018년 그의 쇼에선 마네킹 같은 모델들이 핸드백 대신 자신을 복제한 듯한 머리통을 들고 쇼무대에 나섰다. 그 어느 때보다 충격적이었지만 그 원형은 미국의 의식사회학 교수이자 페미니스트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가 1985년 발표한 ‘사이보그 선언’에 있었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서 사이보그가 탄생한다고 짚었다.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며 상상력과 물질적 실체가 응축된 피조물이 사이보그인 것이다.

당시 전위적이고 괴상하게 들렸던 만큼 ‘힙(hip)’한 단어였고, 공상과학 영화 속 상상이 현실화 되고 있는 지금은 어쩌면 평범한 일상 용어처럼 보인다. 그러한 사이보그 정신을 런웨이를 통해 되물은 게 미켈레다. 그가 끄집어 대중에게 내놓은 사이보그는 요즘의 메타버스로 치환된 건 아닐까. 당시 모델이 선보였던 ‘제 3의 눈’은 구찌가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창이기도 하다.

미켈레가 미국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문장을 들춰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패션은 우리가 겪고 있는 정확한 순간을 말해준다. 패션은 분명 미래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가 우리가 아는 유일한 가능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구찌의 가장 큰 힘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적인 관점을 포함하고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의 마법과도 같다.”

박제되지 않은 생물처럼 계속 변화한다. 그의 변화무쌍한 디자인 스펙트럼은 지루할 틈 없이 한계를 넘어서며 익숙함을 새로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침입과 변형으로 이루어진 실험실 ‘해킹 랩’을 탄생시키며 디자이너이자 연구가, 실험가로서 무언가 계속 시도하려는 미켈레의 정신을 엿볼수 있다.

해킹 랩을 통해 발렌시아가의 철학을 파고든 ‘해커 프로젝트’ 등을 선보인데 이어, 지난 2월 25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익스퀴짓 구찌(Exquisite Gucci)’ 쇼에선 거울이 주는 특별한 영감을 바탕으로 패션의 초현실적인 힘을 표현했다. 굴절 효과를 통해 환상으로 가득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바로크 스타일의 거울처럼, 옷은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되어 우리 존재의 매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최근 선보인 구찌 익스퀴짓 쇼 /구찌
최근 선보인 구찌 익스퀴짓 쇼 /구찌
최근 선보인 구찌 익스퀴짓 쇼 /구찌


자기 복제가 거장만이 해낼 수 있는 발자국인 양 용인받는 이 시대에 미켈레는 자신만의 서사와 상상력으로 제동을 건다. 오는 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 박물관에서 열리는 ‘구찌 가든 아키타이프: 절대적 전형’ 전시를 통해서다. ‘아키타이프’란 이름에서 보듯 복제되지 않는 ‘전형’을 발굴하고, 포착하며 보존해내려 한다. 지나갔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독창성과 재생 불가능한 구찌의 순간들을 재발견하게 된다.

지난해 구찌 100주년을 기념해 미켈레가 직접 큐레이팅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처음 선보인 전시. 지난 6년간 미켈레가 선보인 캠페인을 멀티미디어를 활용해 재해석해 그의 비전을 반영한다. 그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함께 한 지난 6년 간의 여정에 사람들을 초대해 상상과 이야기의 세계를 걸으며, 예상치 못한 반짝이는 순간들을 함께 넘나드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면서 “내 상상으로의 여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캠페인처럼, 감정의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를 기념해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7일 국내 매체를 영상으로 만났다. 구찌 데코의 붉은 색 벨벳 소파에 앉아 여지 없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미켈레는 파란색과 흰색 교차 배치된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황토색 바지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현장에선 해외 유수 디자인 상을 수상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가 모더레이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미켈레는 “무엇보다도 행복하다”면서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흥미로운 일을 해왔고, 그런 실험적인 아이디어가 전시에 반영됐다고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탈리아와 한국과의 거리는 멀지만, 창의적인 활동에 있어서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고, 이러한 전시회가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는 정착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열정이 필요했고, 그만큼 제겐 커다란 선물이기도 합니다.”

DDP에서 열린 구찌 미디어 컨퍼런스. 양태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모더레이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구찌

-구찌에 처음 합류했을 때 100주년을 함께 했을 것이라 생각했는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7년이란 시간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 100주년을 맞은 소감은.

“구찌와 구찌 사람들은 나에게 가족 친척이나 마찬가지다. 구찌의 사람들이 구찌의 근원이자 브랜드를 지탱하는 뿌리다. 이곳에서 미래를 위해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너무나 아름다웠고, 흥분됐다. 구찌는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가 아니다. 신발 같은 데 붙어있는 단순한 마크로 국한될 수 없다. 100년이란 시간을 보낸 뒤에 구찌는 아름다움의 장소가 됐다.”

DDP를 장식한 구찌 가든 아키타이프/구찌

-전시의 이름을 아키타이프라고 붙인 이유는.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형이라는 단어는 아름다움, 창의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미지 속에서 미학적인 여행을 할 수 있다. 지난 7년 간 많은 탐험을 했다. 내가 연구하고, 공부하고, 상상했던 여러 생각의 세계들이 잠재의식 속에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하든, 우리가 흡수하고 받아들이는 이미지엔 절대적인 아름다움, 자유의 이미지가 있다. 우리 삶과 경험에서 이러한 것들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공유하고 메시지를 줄 때 패션 속 언어가 된다. 단순히 하나의 옷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부족하다. 많은 뜻을 내포한 ‘전형’이란 단어를 통해 집합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시에 다양한 시대적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구찌 앤 비욘드는 1960~1970년대 공상과학에서 영감받았고, 쾌락주의와 잉여의 황금기였던 80년대, 노아의 방주까지 캠페인에 차용하는 것도 인상 깊었다. 시적인 감성으로 유명한데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보는 모든 것, 실험하는 과거 현재 상상 그 모든 것이다. 양념이라 할까, 하나의 요소만으로 일을 할 수 없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작업에 담는다. 이미 존재했었던 내러티브를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생산하고자 한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최대한 가장 창의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새롭다.”

DDP에서 열린 구찌 미디어 컨퍼런스. 양태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모더레이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구찌

-공간의 의미는 무엇이고 공간을 구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공간 역시 상상 속의 공간이다. 아름다움을 하나로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공간에 대한 개념은 사물끼리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또 전시 공간을 지나 샵이 있는데, 그곳은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놓는 동시에 하나의 집이라고도 생각한다. 집은 어떤 형태를 바탕으로 어떠한 재료로 짓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집안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그 안에 배치한다.”

-100주년을 지나 새로운 첫 해를 맞이했다. 앞으로 구찌의 모습, 당신이 그려낼 구찌의 미래는 무엇인가.

“구찌의 미래는 전적으로 지금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구찌는 사춘기라고 생각한다. 마치 지금 막 탄생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존속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기에 영원히 젊음을 간직해야 될 거라고 생각한다.”

-구찌의 또 다른 상징이기도 한 ‘구찌의 눈(Gucci Eye)’을 전시 메인 이미지로 사용한 이유는

“눈이라는 것은 우리 신체에서 바로 이미지를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기관이다. 이 전시회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된 것이다. 내 작업은 보는 모든 것을 녹음하고 녹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눈은 상징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이다. 눈을 통해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신비한 요소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마술적인, 마법적인 눈이다.”

-구찌는 MZ 세대를 사로잡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트렌드를 주도하면서도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당신만의 비법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젊은이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다. 1년 반쯤 전에 선보인 구찌 페스트(GucciFest)를 통해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함께 작업했다. (구찌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지원하는 재능있는 15명의 신진 디자이너들을 미켈레가 직접 선정, 구찌 페스트를 통해 컬렉션을 선보였다. 영화감독 구스 반 산트가 촬영한 미니 시리즈 ‘오버추어 컬렉션’과 함께 신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기념하는 영상도 촬영했다) 좋은 젊은이들과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좋은 아이디어를 순환시킨다는 것은 구찌에 있어서도 유용한 작업이다.”

아키타이프 전시 중 2016 크루즈 컬렉션 디오니서스 댄스/구찌
디오라마 전시가 눈을 끄는 2017 가을-겨울 컬렉션 구찌 앤 비욘드/구찌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놓치지 말고 보아야할 것이 있다면.

“해석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방을 지정하는 건 힘든 일이다. 우선 ‘콜렉터스’에 많은 것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사물과 우리와의 관계에 항상 관심이 많다. 캠페인을 미니어처로 만든 디오라마도 즐거운 작업이었다.”

2018 가을-겨울 컬렉션 구찌 콜렉터스/구찌

-한국에서도 구찌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지난해 이태원에 제2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고, 이번 전시회도 선보였다. 카이X구찌 컬렉션 역시 화제였다. 구찌에게, 또 미켈레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은 굉장히 중요한 나라이자 매력적인 나라다. 한국분들이 조심성이 많은 것도 알고 있다. 한국 분들은 모두 좋은 분으로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분들과 일하는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 저와 또 다른 아이디어들도 굉장히 흥미롭다. 팬데믹 기간이 우리에게 힘든 상황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창의적인 할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한국을 통해 그를 증명해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패션계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번 사태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구찌도 그렇고 다른 브랜드도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부를 하고 있다.(구찌의 ‘차임 포 체인지(CHIME FOR CHANGE)’는 유엔난민기구 UNHCR에 50만 달러를 기부하여 우크라이나의 폭력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난민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 특히 폭력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폭력과 거리가 멀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패션 업계에 있는 회사들도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 옆에 함께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어렵고 복잡한 상황이다. 하지만 구찌를 포함한 많은 회사들이, 제가 아는 하는 일을 포함해서. 우크라이나의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협조하고 지원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구찌 익스퀴짓 현장에서 만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와 구찌 글로벌 앰버서더 이정재 /구찌

-당신이 첫 컬렉션에서 ‘꿈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여전히 꿈꾸고 있는가. 관심있는 꿈은 무엇인가.

“나는 항상 꿈을 가지고 있다. 삶의 원동력이다. 꿈이라는 것은 큰 게 아니다. 작은 것에서도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을 경작한다, 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고요함을 즐기지만, 항상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꿈꾸는 것을 꿈꾼다.”

최근 선보인 구찌 익스퀴짓 쇼 /구찌
지난해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팝업스토어로 선보였던 구찌 해커 프로젝트 라인들/구찌
지난해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팝업스토어로 선보였던 구찌 해커 프로젝트/구찌

-급성장 이후 팬데믹으로 정체가 있을까 했는데, 발렌시아가 해커프로젝트부터 이번 익스퀴짓 쇼 아디다스 협업까지 구시대적 패션계의 법칙을 깨고 항상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니즈를 만족시키면서, 어떠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꿋꿋하게 지키는 용기와 과감성이 궁금하다.

“비밀이라고 말씀드린다면, 굉장히 어릴 때 열정을 열심히 심었다. 그 커다란 열정이 원동력이었고, 어떤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참을성 있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 열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열정이 내 삶을 경작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정해진 레시피는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로 집중해야 한다. 일로서 접근하면 안된다. 애인으로서 접근해야 된다. 매일 매일 하는 일에 대해 감사드리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감사를 드려야 한다.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여러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모두 다 신비로운 일이다. 내 나이가 되면 여러가지를 느끼게 될 것인데,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다.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힘과 에너지다. 여러분들의 열정을 열심히 심으라. 경작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