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수록 깊어진다. 위아래로 선을 긋는 단순한 행위가 단색(單色)의 화면에 강렬한 미적 깊이를 부여한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90), 포스트단색화 대표 화가 김현식(56)의 개인전이 서울 소격동에서 나란히 열리고 있다. 각자의 철학으로 수놓인 수직의 무수한 획이 한국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제시한다.

◇박서보, 묘법(描法)이라는 농사

박서보 '묘법 No. 161120'. /국제갤러리

물에 불린 한지 세 겹을 캔버스에 붙이고, 굵은 연필로 선을 긋는다. 농부가 밭을 갈 때처럼 한지에 골이 생긴다. 그 위에 자연의 색을 은유하는 아크릴 물감을 올린다.

글씨 쓰기가 마음대로 안 되자 연필로 공책을 마구 긋던 어린 아들에게 영감을 얻어 탄생한 박서보의 전매 특허 ‘묘법’ 연작은 2000년대 이후 ‘후기 묘법’으로 나아갔다. 일정한 간격의 고랑을 만들고 풍성한 색감으로 자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행위의 무목적성, 무한 반복성, 흔적의 정신화”를 단색화의 세 요소로 정리한 그는 1980년대부터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색과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동양적 물아일체의 철학과 상통하는 까닭이다. 근작 16점을 소개하는 개인전이 국제갤러리에서 31일까지 열린다.

박서보는 단색화 열풍의 핵(核)이다. 해외에서도 뜨겁다. 지난 5월에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측이 2012년작 묘법 한 점의 영구 소장을 결정했고, 프로방스 지역 샤토 라코스트에서도 연말까지 개인전이 열린다.

◇김현식, 현(玄)으로 나아가다

김현식 '현(玄)을 보다 G'. /학고재

나무판 위에 레진(resin)을 발라 말린다. 첨필로 긋는다. 물감을 바르고 표면을 긁어낸다. 골에 색이 남는다. 다시 레진을 붓고 또….

김현식은 이 과정을 열 번 이상 반복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어깨에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레진의 흠집에 스며든 색이 아득히 호흡하는데, 이 현묘한 공간감을 화가는 현(玄)이라 부른다. “오랫동안 평면에 공간을 드러내려 작업해왔다. 무수히 그어진 선은 현의 공간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내 의지다.” 신작 300여 점이 학고재에서 17일까지 전시된다.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색면 추상이 뿜어내는 압도적 힘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김현식은 면적 대신 깊이로 나아간다. 표면이 아니라 표면 너머를 보여주려는 화풍은 자연히 우주적 관점으로 연결된다. “나무판(그림) 옆면을 직각에서 23.5도 기울어진 각도로 깎아 제작했다. 지구 자전축이 기울어진 각도다. 보이지 않는 이 기울어짐으로 밤낮의 길이와 계절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