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품에 안긴 뒤 처음 공개되는 국보 '인왕제색도'. /국립중앙박물관

긴 장맛비가 갠 후, 인왕산에서 장엄한 물안개가 피어난다. 범바위부터 코끼리바위까지, 수성동계곡부터 청풍계까지 먹의 운용만으로 거대한 바위산은 정물(靜物)의 상태를 벗어난다. 1751년 7월의 어느 운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이윽고 2021년 7월 다시 만면을 드러낸다.

‘이건희 컬렉션’을 둘러싼 오랜 운무가 걷힌다.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등 핵심 작품 130여점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에서 21일부터 동시 공개되는 것이다. 지난 4월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의 개인 미술품 2만3000여점이 양 기관에 분산 기증됐고, 이후 분류 및 연구 과정을 거쳐 대규모 전시로 구현됐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19세기 '십장생도 10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은 9월 26일까지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마련했다.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2만1600여 점 중에서 시대와 분야를 대표하는 명품 77점(국보·보물 28건 포함)을 추렸다. 초기 철기시대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 방울’(국보 255호), 삼국시대 금동불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일광삼존상'(국보 134호), 빼어난 고려시대 사경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국보 235호), 현존하는 유일의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 단원 김홍도가 말년에 그린 ‘추성부도’(보물 1393호) 등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실물 근처에 98인치 TV를 비치한 뒤 비 그친 인왕산 풍경을 틀어놓는 등의 관람 장치도 마련했다.

화가 이대원 '북한산'(1938).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내년 3월 13일까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을 개최한다. 기증받은 근현대 미술품 1488점 중에서 권진규·김환기·나혜석·남관·문신·박수근·이상범 이중섭·장욱진·채용신·천경자 등 국내에서 인기 높은 작가 34명의 주요작 58점을 선보인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됐다. 일제강점기 조선 전통 서화의 변화(이상범 ‘무릉도원’), 광복 후 발아한 한국미술의 근간(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전후 복구 시기 구축되는 고유한 조형 세계(김흥수 ‘한국의 여인들’) 등의 서사 흐름이다.

화가 장욱진 '마을'(1951).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자의 뜻을 이어받고자, 이번 전시는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다만 19일 사전 예약 개시와 동시에 이달치 티켓이 전부 마감됐다. 뜨거운 전국민적 기대치를 반영한다. 기증품을 넘겨받은 양 기관이 동시에 개막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각 기관의 큐레이션 역량을 비교할 척도로도 기능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