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출판물로 등록해 부여받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등허리에 문신으로 새긴 피오나 배너. 작품명은 '책으로 묘사된 자화상'이다. /바라캇컨템포러리

흔히 사람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하지만, 이 여자는 출판 등록까지 마친 ‘진짜 책’이다.

영국 개념미술가 피오나 배너(55)는 2009년 ‘허영의 출판사’(The Vanity Press) 를 설립해, 정부에 자기 자신을 도서로 정식 등록한 뒤, 발행된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등허리에 문신으로 새겼다. 스스로를 출판한 일종의 행위 예술인 셈이다. 작가는 “이른바 ‘자서전’에 대한 흥미로운 도전”이라며 “생명과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했다.

출판 등록한 백미러 위에 ISBN을 새긴 작품 ‘항문을 지닌 신’(2021). /바라캇컨템포러리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서울 삼청동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8월 15일까지 열린다. 책 한 권 없지만, 전시장은 작은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천장에는 ‘ISBN 978-1-913983-05-5’라고 인쇄된 자동차 백미러가 걸려 있다. 비치된 간이 의자에도 ISBN이 적혀 있다. 출판 등록이라는 행정 절차를 거쳐, 정물 자체를 ‘읽을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독특한 출간은 “작품 공유와 유통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내 작품이 갤러리를 벗어나 국경과 관계없이 공유 가능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작가의 표현 방식 기저에는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 시인을 꿈꿨고, 활동 초창기부터 이미지 대신 언어를 도구로 사용해왔다. 할리우드 전쟁 영화나 포르노그래피 속 장면을 오로지 단어로만 묘사해 전시장 벽면에 늘어놓는 ‘단어 풍경’(wordscapes) 작업으로도 유명하다.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에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는 주장이다. 전시장 2층 구석에 A3 용지가 사람 키 높이로 쌓여있다.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던 영국 소설가 톰 매카시(52)와 함께 쓴 단편 희곡이다. 전시장 1층에 놓인 튜브 재질의 대형 전투기(팔콘)가 다른 전투기(타이푼)와 대화하는 약간은 황당한 픽션으로, 관람객 누구나 한 장씩 가져갈 수 있다. “전시 공간을 연극 공간으로 확장하는 시도”라며 “이 출판물은 조각이자 주춧돌이며 퍼포먼스”라고 했다.

한국인들이 채팅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장 부호(물결표)를 기존 해경화 위에 덧그린 작품 'Tilde'(2021). /바라캇컨템포러리

시장에서 해경화(海景畵)를 구입해, 그 위에 문장부호를 그려 넣음으로써 가라앉고 부유하는 언어에 대한 수수께끼를 표현한 회화 신작도 처음 공개된다.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해 나름의 현지 조사도 거쳤는데, 작가가 발견한 한국만의 독특한 문장 부호가 바로 ‘물결표’(~)였다. 한국인들이 채팅할 때마다 말미에 물결표를 붙이는 방식이 재밌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물결표가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그림 ‘Tilde’가 탄생했다. “이 부호의 물결 혹은 파도 모양이 해경화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Tilde(물결표)가 Tide(조수)라는 영단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전시 동선상 마지막에 ‘BAD REVIEW’라 쓰인 백미러가 놓여 있다. 이 생경한 풍경을 혹평하려면 일단은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