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 ‘섶섬이 보이는 풍경’(33.3×58.6㎝)은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제주 서귀포에서 지내던 1951년 그린 것이다. 초가지붕 사이로 나무와 전봇대, 바다와 섬이 어우러져 전쟁의 참화를 잊게 하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중섭미술관

화가 이중섭(1916~1956)이 1951년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그가 짧은 생애에서 가족과 함께 가장 행복했던 제주 시절, 서귀포 바다 너머 보이는 섶섬을 담은 그림이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있던 이 그림이 제주 이중섭미술관으로 기증됐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29일 브리핑을 열고 “이중섭미술관 옥상에서 보이는 섶섬이 작품 속 풍경과 매우 닮았다”며 “화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안긴 공간에서 작품과 작품 속 풍경을 비교하는 특별한 시간을 선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중섭 화가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건희 컬렉션’이 지방 공공 미술관 다섯 곳으로 건너간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등 서울 중심 기관뿐 아니라, 지역 문화 예술 성장에도 이건희 회장의 유족 측이 신경 쓴 결과다. 기증 품목은 지역 특성을 감안해 출신 작가와 작품에 깃든 사연까지 고려한 것이라 의미가 크다. 이중섭미술관은 총 12점의 이중섭 원화(原畵)를 받았는데, ‘섶섬이 보이는 풍경’ ‘게’ 등 대체로 서귀포와 관련 깊은 지역 친화적 작품이다. 미술관 측은 “내년 개관 20주년을 목표로 이중섭미술관 시설 확충을 계획 중”이라며 “기증 작품을 통해 전시 질(質)을 끌어올리고 동시에 공간도 그에 걸맞게 변화하는 기증의 가장 모범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이건희컬렉션 전국 지도
박수근 '한일'(閑日)→강원도 박수근미술관

강원도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그림 18점이 전달됐다. “홍라희 여사가 가족을 대표해 기증한 것”이라 한다.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으로, 시골 미술관 작품 구입 예산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규모다. 특히 유화 ‘한일(閑日)’은 해외로 반출됐다가 2003년 뉴욕 경매에서 낙찰돼 다시 국내로 돌아왔고, 이제 박수근의 이름을 딴 미술관에 안착하게 돼 더욱 뜻깊다. 미술관 측은 “기증의 의미와 작품의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자 아카이브 전시실에 기증 섹션을 마련했다”고 했다. 전시는 10월 17일까지 이어진다.

이인성 '여인초상'→대구미술관
천경자 '꽃과 나비'→전남도립미술관
오지호 '계곡추경'→광주시립미술관

이번 기증은 지역 미술사(史) 연구와 작가 위상 강화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대구 대표 화가 이인성, 경북 울진 태생 추상 거장 유영국 등 21점의 작품을 확보한 대구미술관 측은 “이번 기증이 꾸준히 지역 작품을 수집해야 하는 지방 미술관을 수준급으로 도약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전남도립미술관 기증 목록은 고흥 출신 천경자, 신안 출신 김환기, 진도 출신 허백련 등 남도 작가 중심으로 진영이 짜였고, 9월부터 특별 전시를 두 달간 개최한다. 광주시립미술관 역시 남도 서양화단의 뿌리 역할을 한 오지호 등 화가 5인의 작품 30점을 수확했다. 미술관은 “개관 30주년을 맞는 내년 특별전을 통해 기증품을 공개할 예정”이라며 “기증자의 배려가 미술관의 품격과 질적 향상에 이바지할 것”이라 밝혔다.

정부 역시 기증자를 기리는 특별관 마련을 고려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29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건희 회장의 기증 정신을 잘 살려 국민이 좋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 전시실이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관이 따로 생기거나, 신규 미술관 건립 등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