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명사(名士)가 아끼는 본인의 미술 소장품을 소개합니다. 소장품과 얽힌 개인적인 추억, 액수가 아닌 온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회는 소리꾼 장사익(72)씨가 지금껏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소중한 그림을 꺼내 보입니다.
“사익 兄(형),사람 껍질 못 벗는 주제들이 사람답게 살다 죽읍시다.”
캔버스 뒷면에 화가는 검은 붓으로 이렇게 썼다. 11년 전 어느 봄, 소리꾼 장사익(72)씨는 그림을 받아들고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그곳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 황재형(69)씨가 건넨 유화였다. “형님, 내 마음이오.” 그림 속 회색의 엄혹한 배경 속에 발가벗은 두 아이가 너무도 당당하게 서 있다. 장씨는 “저 아이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림은 그해 1월 그려졌다. 그리고 봄에 장씨의 품에 안겼다.
이후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약 50호(116x91㎝) 크기의 그림은 제목이 없다. 장씨는 “내 나름의 제목을 붙이자면 ‘금덩이’라고 짓고 싶다”고 말했다. 벽에 걸린 그림 위로 햇살이 쏟아질 때, 그림 속 아이들은 정말 금덩이처럼 보인다. “선물 받을 때 너무 따스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화가 부부 얼굴이랑 많이 닮았다. 화가의 자화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중하게 키워 얘네 장가갈 나이쯤 되면 돌려주마’하고 약속했다. 그런데 갈수록 애착이 생겨 그 마음이 자꾸 약해진다.”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 온 두 사람은 곡진한 삶의 현장을 거쳐 예술에 닿았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1983년 황씨는 당대의 민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식솔을 모두 데리고 산골로 이주했다. “덩치 크고 구레나룻도 덥수룩하고 태백산 호랑이 같은 친구다. 깊은 물에 사는 물고기, 얕은 데 사는 물고기가 있듯, 그는 막장이라는 환경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직접 광부 생활까지 해가며 석탄 섞인 도시락을 비벼 먹으며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다. 그림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관념으로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의외다. 광부의 초상이나 백두대간의 겨울과 강골을 담아내는 기존의 작풍과 확연히 다르다. 갱도 밖에 선 아이들의 몸 위로 온기가 피어나고 있다. “이 친구의 그림 속엔 늘 ‘빛’이 있다. 어떤 희망처럼 느껴진다.” 장씨는 그림을 상시 벽에 걸어두는 대신, 창고에 보관해뒀다가 보고 싶을 때 꺼내본다. “겨울에 볼 때, 여름에 볼 때, 눈 올 때, 비 올 때 다르다. 상념이 매일 연속적으로 오는 게 아니듯이. 어떨 때는 두 아이가 귀엽고, 당차고, 신비롭다. 그게 묘미 같다.”
돌이켜보면 그림은 생활 저변에 존재했다. “30여 년 전 직장이 안국동이었다. 천호동서 버스 타고 인사동에서 내려 일부러 화랑가(街)를 지나 출근했다. 그림 보는 건 공짜니까. 6개월쯤 지나니 ‘어, 저 그림 예쁘다’ 눈에 들어오더라. 가격 물어보고는 금세 도망나오고.” 그렇게 그림에 눈을 떴다. 2010년에는 아내를 도와 갤러리를 열어 3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카센타에서 일할 때도 차에 꽂힌 테이프를 보면 수준을 알겠더라. 차는 벤츠인데 고속도로 테이프만 꽂혀있는 경우가 있다. 비싼 집에 가도 거실에 이발소 그림 걸려있으면 ‘이 집 주인은 투기로 돈 벌었나?’ 싶다. 반대로 그림이 좋으면 ‘햐,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싶고. 음악 하나, 그림 하나가 공간을 지배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흔드는 것, 거기에 미술의 무한한 가치가 있다.”
☞화가 황재형은 누구?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민중미술 대표 화가로 동인 ‘임술년(壬戌年)’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자의 현실을 마주하겠다”며 1983년 태백 탄광촌으로 들어가 ‘광부 화가’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