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글자일 뿐 아니라 소리이자 몸짓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근본 철학임을 말하는 전시였어요.”
두 시간 가까이 전시장을 천천히 걸으며 관람한 뒤, 춤꾼 안은미가 내놓은 첫마디였다. 장르와 국경을 넘나들며 자기만의 춤 영토를 거침없이 개척해온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지난 1일 조선일보 100주년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을 찾았다.
색색의 물방울무늬 모터바이크를 직접 몰고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나타난 그는 오전 10시 관람을 시작해 정오가 가까운 시각까지 꼼꼼히 작품들을 살폈다. 최병소 작가의 신문지 작업 앞에서 “정말 고된 작업이었겠다”며 놀라워했고, ‘월드와이드웹’의 탄생을 예언한 듯한 백남준의 ‘W-3’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무용가 김효진의 영상 ‘여민락’ 앞에선 “발로 쓰는 글씨군요” 하더니, 전남 곡성 할머니들 손글씨 앞에선 “그림도 참 잘 그리신다”며 감탄했다.
관람을 마친 뒤 방탄소년단 리더 RM을 비롯해 전시를 보고 간 관람객들의 소감 글들이 걸린 곳에 직접 쓴 붓글씨를 걸고 나서야, 안은미가 말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창작품도 좋았지만,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목판, 일제강점기 이육사 시인이 육필로 쓴 한글 원고와 마지막 그림이 기억에 남네요. 난초 그림의 이파리가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살아서 일제의 눈이라도 뽑아낼 것 같은 기상이 느껴졌어요. 뇌가 새로 작동하는 것 같고, 겸허해지고, 가슴 한편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어요. 인간의 마지막 힘을 다한 기도를 그림 한 장에 담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안은미가 말한 것은 이육사 시인이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 그린 난초 그림 ‘의의가패(依依可佩·풀이 무성하게 푸르러 훌륭한 지경)’와 시인의 유일한 육필 시고 ‘편복(蝙蝠·박쥐)’이다.
짜인 틀에 안주하는 일 따위는 당최 체질에 맞지 않는 안은미에게, 미술관은 익숙한 춤의 무대다. 작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데뷔 30주년 기념 ‘안은미래(Known future)전’엔 그의 춤 여정을 담은 회화·영상·공연·의상들 사이로, 전시장 바닥에 가득 깔린 공들 틈을 걷고 넘어지는 관람객들 모습 자체가 춤이 됐다. 1988년 창단한 무용단 ‘안은미컴퍼니’는 독일의 피나 바우슈 페스티벌과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에 한국 무용단으로는 처음 초청받았다. 2018년 ‘현대 공연 예술의 심장’으로 불리는 프랑스 테아트르 드 라빌 극장의 상주 예술가로도 선정됐다. 할머니, 중년 아저씨, 장애인 등 현대무용과 인연이 없던 이들의 몸짓을 무대로 끌어오는 파격 실험도 국내외 주목을 받았다.
사회의 소외된 그늘에 주목해온 무용가답게, 안은미는 이번 전시에서도 한글을 통해 드러나는 힘없는 백성을 향한 마음, 애민(愛民)의 정신에 주목했다. “다시 들여다보기 전엔 그냥 문자였죠. 그런데 이 전시의 렌즈를 통해 한글이 만들어진 근원, 가난한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고 구현되는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는 “이 땅 위의 역사와 기억을 모두 짚어보고, 하늘 아래 땅 위에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까를 질문하는 전시”라고도 했다. “전시는 잃어버린 기억을 불러오고 우릴 긴장시키죠. 삶의 리듬을 다르게 환기시키는 힘이 있어요. 책이나 TV와는 다른 힘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