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 응암동 작업실에서 만난 유승호 화가가 ‘ㄱ의 순간’ 출품작 ‘가나다라’앞에 섰다. 수만 개 빼곡한 한글 글씨가 정통 산수화를 그려낸다. 가까이 가면 글씨가 보인다(오른쪽 위 작은 사진).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멀리서 보면 산수화, 가까이 보면 글씨다.

“그림과 글씨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화가 유승호(46)씨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지 위에 직경 1㎝ 채 안 되는 검은 글씨를 펜으로 수만 번씩 반복해 쓴다. 티끌이 태산을 이룩한다. “‘평범한 산수화인가?’ 하고 봤다가 ‘엥? 뭐야’ 놀라게 하고 싶었다. 함정 파놓듯이. 장난스러운 글씨와 진지한 동양화의 상반됨이 뒤통수치도록.”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여하는 유씨는 이른바 ‘글자 산수’의 개척자다. 중국 북송(北宋) 화가 곽희·범관, 조선 시대 안견·정선 등의 실제 산수화를 주기도문 및 만화책 등에서 뽑아낸 한글 글씨로 형상화하는 신개념 점화(點畫)다. ‘쓴다’와 ‘그린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발랄한 미적 소재로서 한글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전시는 11월 12일부터 내년 2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주룩주룩, 우수수수, 뭉실뭉실, 슈슈슈, 발발발…. 그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의성어·의태어다. “직접적이고 저차원적인 단어를 골라 고풍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유치함이 진지함과 대결하도록.” 이를테면 그는 농담의 중첩으로 농담(濃淡)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글씨를 겹친다기보다 사이사이 메운다는 느낌으로 적는다”고 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글씨가 화폭에서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은 이윽고 관람객에게 닿아 단말마로 변모한다. 글자와 그림의 합일을 꾀한다는 점에서 그는 남관·이응로 등 문자 추상 대가들과도 맥이 닿아있다. “공부할 겸 자주 본다”고 했다. 작가의 응암동 작업실 벽면에는 달력에서 오려둔 이응로 그림이 걸려있다.

작업실 옆 우사(牛舍)에서 날아든 파리떼를 때려 잡다가 착안한 작품 '앵'(2002).

1997년, 대학교 과제를 앞두고 “남들과 다르려면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공책에 끄적이던 글씨를 화폭에 옮긴 게 시발이었다. 23년이 흐른 지난 19일에도 유씨는 이번 전시 출품작 ‘가나다라’를 위해 캔버스에 글씨를 채우고 있었다. 세, 월, 아, 돌, 려, 다, 오, 각 글자를 수천번씩 써서 그린 산수화다. “당시 절대적 이상향을 표현한 산수화를 지금 사람들은 그저 고루하게만 느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먼 고요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천천히 바라보는 것을 중요시했던 옛 시절의 희구(希求)를 담은 그림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한글은 생활이며, 가끔 경이로운 번뜩임으로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난했던 신인 시절, 외양간 건물을 개조한 경기도 남양주 작업실에서 2년간 생활했다. “작업실은 말끔했어도 옆 건물은 여전히 우사(牛舍)였다. 파리가 한지에 똥을 싸면 지워지지 않으니 죽기 살기로 때려잡았다.” 그러다 파리 날갯짓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에 ‘앵앵앵앵…’을 써놓고, 그 끝에 때려 잡은 파리 사체를 붙여놨다. 작품 ‘앵’(2002)의 탄생이었다. ‘기역멘’(2015)은 아들에게 빚졌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 따라 한답시고 종이에 ‘ㄱ’만 빼곡하게 적어 수퍼맨 형상을 그려놨더라. 재밌어서 큰 그림으로 다시 제작했다.”

지난해부터 새롭게 시작한 '라멜라 양' 연작. 수묵화의 극단적 형태로, 선 위에 물을 뿌린 것이다.

실험은 계속된다. 2015년에는 명필의 대명사 한석봉, 그중에서도 “가장 이미지에 가까운 글씨” 초서체(草書體) 획을 변주해 새 형상을 창조했다. 지난해부터는 만년필 선(線) 위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우연의 번짐을 유도하는 극단적 수묵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중 마음에 드는 획을 채집해 문자를 그리고, 이를 조합해 한지 위에 일종의 시(詩)를 적는다. 외계 언어로 나아간 것이다. 이번 전시 또 다른 출품작 ‘ㄱ으로부터’는 그 결과물이다.

지금도 하루 6시간씩 매일 글씨를 쓴다. “주로 창문 옆에서 한다. 시력이 나빠지니 수시로 밖을 내다봐야 한다.” 손가락 인대가 너무 닳아 병원 신세도 졌다. “한쪽 팔에만 무리가 안 가도록 요새는 양손으로 글씨를 쓴다. 양손잡이가 됐다.” 한글과 함께 그 역시 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