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화

“내 이름을 딴 건축 자료관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건축가 아버지는 자기 생애 동안의 건축 작품들을 모아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1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따라 건축가가 된 딸은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다. 6일 제주도 한림읍에 개관한 ‘유동룡미술관(이타미준뮤지엄)’이 탄생한 배경이다.

유동룡은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水風石) 박물관’ 등의 건축 작품을 남긴 이타미 준(伊丹潤·1937~2011)의 본명. 바람, 물, 돌 등 자연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추구해 ‘바람의 건축가’로도 불린다. 재일교포인 그는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일본의 현장을 넘나들었다. 두 나라를 오가며 작품을 남긴 그는 2006년 ‘김수근 문화상’, 2010년 ‘무라노 도고상’ 등 양국 건축계의 권위 있는 상을 휩쓸었다. 지상 2층, 200평 규모 미술관은 이타미 준이 40여 년 동안 남긴 건축 작품 모형과 함께 그의 가구와 회화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건축가이자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딸 유이화(48)씨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 공간을 ‘미술관’으로 명명했다.

이타미 준은 건축이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엔 자연의 모습을 형상화하거나, 주변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우선한 건물이 많다. 위에서부터 유동룡미술관·포도호텔·수풍석 박물관. /김용관·JOON CHOI·SHINICHI SATO

유 이사장은 2001년부터 아버지를 도와 건축 실무를 담당한 업무 파트너였다. 한국어가 서툰 아버지의 통역을 맡아 초등학교 때부터 건설 현장을 따라 다녔고, 자신의 말이 아버지의 건축물로 구현되는 것을 보며 건축의 세계에 빠졌다. 이화여대를 나와 아나운서가 되길 바라며 딸의 이름을 ‘이화’로 지었던 아버지였지만, 딸은 아버지의 꿈을 저버렸다. 이화여대에서 실내환경디자인을 공부한 뒤 혼자서 뉴욕의 유명 사립 미술대학 프랫 인스티튜트로 떠났다. 이후 딸은 제주도를 기반으로 활동한 아버지를 도와 그의 건축 철학을 건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타미 준의 대표작인 ‘포도호텔’ 등 제주도에 남겨진 많은 작품에는 유 이사장의 손길이 함께 남아 있다.

유 이사장은 “그간 많은 건물을 설계했지만, 이번 미술관만큼 부담이 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지금도 설계를 할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한다는 것. 미술관 건립은 몇 년 동안 후원자들을 찾아다녀야 할 정도로 재원 조달이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가장 부담됐던 것은 ‘이타미 준다워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아버지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봐 가장 무서웠죠. 저 역시 아버지의 모든 면을 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이타미 준의 작품은 주변 환경을 해치지 않는 ‘절제된 건축’을 표방했다. 이번 미술관 설계에서 중점을 둔 부분 역시 이타미 준이 강조한 ‘지역성’과 ‘겸손함’을 담아내는 것. 건물 중앙에는 2층 규모의 타원형 전시 공간이 화산처럼 솟아 있다. 이곳 주변은 숲으로 우거진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도드라지는 색감과 소재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 미술관을 지배하는 색깔은 무채색. 내부는 이타미 준이 즐겨 사용했던 먹색으로 칠했다. 바닥엔 검은색 현무암을 깔았고, 벽은 먹색으로 칠한 떡갈나무 원목과 직물을 둘렀다. ‘이타미 준’ 미술관이지만, 개관전 ‘바람의 건축가’ 이후엔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자리를 내어줄 예정이다.

유 이사장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이 ‘내 딸답다’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건축가로서 아버지를 존경했기 때문. 건축가 아버지는 딸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까. “아버지가요? 내 딸답다고, 잘하셨다고 하실 거예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