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륜동 주택가 언덕배기, 검붉은 벽돌에 검은 목재를 두른 범상치 않은 집 한 채가 있다. ‘古石空間(고석공간)’이란 네 글자를 크게 새긴 문패 아래 한 줄 설명이 붙어 있다. ‘1983년 11월 김수근 설계 작품’.
80평 남짓한 대지에 둥지 튼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벽돌집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누이 김순자(궁중 의상 디자이너·1928~2021) 여사와 자형 박고석(1917~2002) 화백을 위해 지은 살림집이다. 김수근이 누군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경동교회 등을 설계한 한국 근대 건축의 최고봉 아닌가. 1983년 암 판정을 받은 그가 세상 떠나기 3년 전 ‘꼭 해야 할 일’이라면서 마지막 힘 한 방울까지 쏟아부어 만든 집이다.
김수근이 누이 사랑, 자형 향한 경외를 자신의 건축 언어에 꾹꾹 눌러 담아 지은 고석공간이 얼마 전 새 주인을 만났다. 구순을 넘긴 김 여사가 더는 살림집을 관리할 수 없어 부동산에 집을 내놓은 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김 여사는 아무리 돈을 많이 쳐준다고 해도 선뜻 팔지 않았다. 조건은 오직 하나. 집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2년 전 만난 인연이 황정욱(58·언론인), 전정아(50) 부부다. 업무상 워싱턴에서 몇 해 거주한 뒤 귀국한 이들은 사대문 안 고즈넉한 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다가 이 집을 발견했다. 아내 전씨는 “한눈에 반했지만 부동산을 통해 전달된 집주인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그러더니 한참 뒤 이력서를 달라더라”고 했다. 두 사람은 해온 일과 학력까지 적어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두 달쯤 뒤 집주인이 만나자고 했다. 두 사람을 마주한 김 여사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37년간 매일 이 집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걸었어요. 이제 떠나보낼 단계가 됐나 봅니다. 이 집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요?” 느지막이 결혼해 신혼 4년 차였던 부부가 말했다. “‘집’으로 쓰려고 합니다. 저희 부부 첫 집요. 김수근 선생님과 박고석 화백님의 자취를 최대한 품은 채 살려고 합니다.” 김 여사의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다음 날 이들은 집 계약서에 사인했다. 2년 전 집과 작별한 김 여사는 작년에 생(生)과도 이별했다.
부부는 부엌 재배치 등 리모델링을 약간 한 뒤 입주했다. 내부에 들어서면 골목 쪽 전면을 채우는 커다란 격자 미닫이창이 손님을 맞는다. 한쪽 문 폭이 3m를 넘는다. 2층엔 툇마루와 한옥 스타일 방이 있다. 우리 전통을 사랑한 김수근이 집 안으로 끌어온 미니 한옥인 셈이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붉은 벽돌, 한 사람이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나선형 계단 등 김수근의 건축 특징이 농축된 옹골찬 공간이다.
김수근은 집 설계를 부탁한 누이에게 “내가 지으면 불편할 것”이라고 거절했지만, 누이는 “불편을 멋으로 여길 테니 마음대로 지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새 주인은 “집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지만 기꺼이 불편함을 즐기려 한다”고 했다.
1층 거실 벽에는 박고석이 1992년 그린 풍경화 ‘울산바위’와 사진가 강운구가 찍은 박고석의 흑백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부부는 “박 화백을 추억할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있으면 의미 있겠다 싶어 여사님께 구입했다. 걸려 있던 그대로 뒀다”고 했다. 박 화백이 집에 뒀던 심문섭의 조각, 신옥진의 물고기 그림도 사서 그 자리에 뒀다. 부부는 “미술과 건축에 조예가 깊지 않았지만 이 집을 맞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며 웃었다. 박고석이 화실로 썼던 지하 1층엔 부부가 공부한 건축 서적과 박고석 화집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김수근이 운영하던 건축 사무소 ‘공간’에 있으면서 이 집 설계에 참여했던 박고석의 장남 박기태(71)씨는 “집이 완공될 때까지 전혀 참견 안 하시던 아버지가 막판에 외숙께 ‘집 갖고 장난 좀 그만 쳐라’라고 딱 한마디 하시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이 집은 김수근, 김순자, 박고석 세 분의 분신”이라며 “주인이 바뀌었지만 이 집에 밴 그들의 예술 열정은 고석공간과 함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