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에서 개발중인 글꼴은 특수 기호로 얼굴 표정을 만들었을 때 기존 글꼴에 비해 감정이 더 자연스럽고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간격이나 비례, 모양을 조정했다. /카카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에서 지난달 펴낸 강연집 ‘디지털 시대의 타이포그래피’는 ‘검은 것은 글자, 흰 것은 종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석재원 부회장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요지는 글자의 짝꿍이 종이에서 화면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디지털 타이포그래피(문자 중심 시각디자인)의 첨단을 제시한 16편의 강연 가운데 카카오가 개발 중인 글꼴이 눈에 띈다. 스마트폰이라는 환경에 맞게 글자 모양을 다듬고, 한글 초성(자음)이나 특수 부호만으로 이뤄지는 대화까지 디자인에 반영한 글꼴이다.

디지털 글꼴이 진화하고 있다.‘ 꽃이 핀다’라는 문장을 서로 다른 글꼴로 구현했다. 위부터 마루 부리, HY신명조, 노토 산스 KR, 굴림체, 아리따 돋움, 문체부 바탕체. 네이버가 화면용으로 개발한 마루 부리는 기존 고딕 계열과 달리 부리(획 끝의 꺾임)가 있지만, 명조 계열 글꼴에 비하면 획 변화가 덜하고 직선적이다.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화면’인 시대. 글자도 변한다. 작은 화면에서도 잘 보이게 하는 것은 기본. 글자로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고, 디지털 세상에서 획일화되는 한글 글꼴을 다변화하려는 노력도 나타난다. 미세하지만 분명히 일상의 글자 풍경을 바꾸고 있는 변화들이다. IT(정보기술) 기업들이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가운데, 독림 디자이너들도 새로운 디지털 글꼴 시험에 나서고 있다.

◇'ㅋㅋ’ ‘^^’도 단어

카카오에서 개발중인 글꼴은 특수 기호로 얼굴 표정을 만들었을 때 기존 글꼴에 비해 감정이 더 자연스럽고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간격이나 비례, 모양을 조정했다. /카카오

카카오가 연말쯤 공개 예정인 새 글꼴은 “초성이나 부호도 하나의 단어”(이화영 브랜드디자인파트장)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실제로 디지털 세계에선 ‘ㅋㅋ’나 ‘^^’ ‘:)’ 같은 기호가 ‘웃음’의 의미로 통용된다. 카카오는 초성만 나열해도 시각적으로 단어처럼 보이도록 크기를 키우고 간격도 좁혔다. 대부분 기존 글꼴에서 초성만 입력하면 온전한 글자보다 크기는 작고 자간은 넓어서 어색해 보이던 점을 개선했다. 특수 부호 역시 모양·배열 등을 미세하게 조정해 감정 표현을 더 확실하게 해준다. ‘:)’에서 괄호의 입꼬리를 기존 글꼴보다 올려서 더 활짝 웃는 얼굴로 만들어주는 식이다.

스마트폰에선 글씨 크기도 사용자가 설정한다. 보통은 같은 모양의 글씨를 크기만 달리하지만 카카오는 작은 글씨와 큰 글씨를 다르게 디자인했다. 예컨대 작은 글씨에서는 ㅎ이나 ㅊ의 각머리(꼭지 부분)를 잘 판독되도록 세우고, 큰 글씨에서는 익숙한 모양대로 눕혔다. 금융 앱 토스가 지난해 자사 서비스용으로 개발한 글꼴도 작은 화면에서의 시각적 균형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보통의 본문 글꼴은 한글보다 영문·숫자가 살짝 작은데, 책처럼 긴 줄글에서 안정적인 이 비례가 스마트폰에서는 어색하기 때문에 영문·숫자를 한글보다 살짝 키웠다. 획의 굵기도 한글과 똑같으면 영문·숫자가 가늘어 보여 살짝 더 굵게 했다고 한다.

◇디지털 명조체의 새 가능성

네이버가 개발한 화면용 명조체 '마루 부리'. 쌍자음이 작은 화면에서 뭉쳐 보이지 않도록 모양을 단순화했다. /네이버

디지털용 한글 글꼴은 직선적인 고딕 계열 일변도였다. 획 모양이 복잡한 글자는 작은 화면에 표현하기 어렵고 읽기도 피곤하기 때문. 그러나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 기기 화면의 해상도가 올라가고 세밀한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디지털에 맞는 명조 계열 글꼴을 발견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가 지난 한글날을 맞아 배포한 ‘마루 부리’도 그렇게 탄생했다. 긴 글을 읽어도 피로감이 적은 화면용 명조체를 목표로 가로·세로 획의 굵기 대비를 줄였다. 작은 화면에서도 뭉쳐 보이지 않도록 ㅃ, ㄸ 같은 쌍자음은 모양을 단순화했다.

디자이너 임용태의 'FS 아티클 부리' 글꼴로 짠 본문이 스마트폰 화면에 구현된 모습(왼쪽). 오른쪽은 이 글꼴(가운데)과 기존 명조 계열 'SM신신명조'(왼쪽), 고딕 계열 '노토 산스 KR'(오른쪽)의 차이를 보여준다. 명조 계열에 비해 직선적이고 획 변화가 덜하지만 고딕 계열과 달리 부리(획 끝의 작은 꺾임)가 있다. /디자이너 임용태 제공

기업들만 이런 시도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 임용태의 ‘FS 아티클 부리’도 활자 쏠림 현상에 대안을 제시한 글꼴이다. 부리(획 끝의 작은 꺾임)가 있지만 기존 인쇄용 명조체에 비해 모양이 간결하고, 획의 변화도 덜하다. “부리(명조체) 계열의 온화한 인상과 민부리(고딕체) 계열의 수수한 인상을 담았다”고 소개한 이 글꼴은 크라우드펀딩(인터넷 소액 후원)을 통해 디자인했다. 목표 금액의 3배 이상을 모았으니 새로운 글꼴의 등장에 사용자들도 호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