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황두진(오른쪽)이 서울 통의동 자택 겸 사무실에서 유대혁(화면 안 왼쪽), 김현경과 건축가 이훈우의 행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비대면 공동 연구로 이훈우 관련 논문 2편을 작성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건축가 황두진(58), 미국 금융 정보 회사에 근무하는 역사 애호가 유대혁(54), 일본 고중세사 연구자 김현경(37)이 페이스북에서 교류하다 단체 채팅방을 만든 것이 지난해 초였다. 채팅방 이름은 ‘이훈우를 찾아라’. 이들은 이훈우(1886~1937)를 한국 최초 근대 건축가로 보고 그 생애를 추적하고 있다. 지난해 첫 논문을, 지난달 두 번째 논문을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지 ‘건축역사연구’에 실었다.

셋 다 이 분야 전문 연구자가 아닌데도 학술 논문을 두 편이나 펴낸 것은 이례적이다. 논문 내용에 대해 논의할 때처럼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들은 “학계의 교차 검증을 거쳐야 공공 지식이 된다는 생각에 논문 형식을 택했다”고 했다.

2017년 황두진이 천도교 관련 자료에서 ‘1924년 완공한 대신사기념관(교조 최제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건물)을 이훈우가 설계했다’는 내용을 발견하고 의문을 제기한 일이 시작이었다. 박길룡(1898~1943)이 1929년 설계한 ‘김연수 주택’을 한국 근대 건축의 출발로 보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 이훈우는 이름만 드물게 언급될 뿐 작품이나 생애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인터넷에서 바늘 찾는 공동 연구가 시작됐다. 유대혁과 김현경이 각각 1921년 발간된 잡지 ‘개벽’과 동아일보에서 이훈우건축공무소 광고를 찾아내 그가 나고야고등공업학교 출신임을 확인했다. “조선일보가 창간 100년을 맞아 뉴스 라이브러리를 공개한다는 소식에 첫 논문 완성을 미뤘어요. 1920년 12월 16일 자의 개업 광고를 찾고, 조선일보 평양 지국을 비롯해 이훈우가 설계한 건물들도 확인할 수 있었죠.” 이들은 “온라인으로 검색 가능한 한국사 자료가 이렇게 방대한 줄 몰랐다”고 했다.

두 번째 논문에선 족보가 단서가 됐다. 후손을 만나 경남 하동의 이훈우 묘소를 찾아내고 상세한 가족 관계를 규명했다. 생몰 연대를 밝히고 사진과 초상화를 확인한 점도 성과다. 황두진은 “사소하다고 생각한 단서도 파고들면 고구마 줄기처럼 중요한 사실이 나왔다”고 했다.

이훈우를 조명한다 해서 화신백화점·간송미술관 등을 설계한 박길룡의 건축사적 의미가 퇴색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유대혁은 “박길룡이 공부한 경성고공은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인 반면 이훈우는 더 앞선 시기에 능동적으로 유학을 떠나 새로운 건축을 배웠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현경은 “교육학을 전공하는 지인은 이훈우의 유학을 근대 교육사(史)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면서 “다방면으로 확장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다음 논문에선 이훈우의 건축과 그 시사점을 찾아볼 계획이다. 이훈우 설계로 확인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 없어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지만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두 논문이 두루 읽히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또 물꼬가 트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