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준 통한의 1·4 후퇴.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용감하게 싸워 1951년 3월 다시 38선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중공군은 4월, 5월 대공세를 벌였지만 무려 18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실패했고, 6월에는 전선이 38선 부근으로 고착됩니다.
이 무렵의 국군과 유엔군은 3개의 군대와 맞서고 있었습니다. 38선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있었고, 후방 지리산 일대에는 빨치산 ‘남부군’이 있었습니다.
눈앞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등 뒤의 적입니다. 남부군은 최소 2만5000명에서 최대 5만명으로 추산되는 대부대였습니다. 부산항에서 하역해 전선으로 향하는 아군의 보급선은 이들에 의해 수시로 끊겼습니다. 보급이 막히면 군대는 싸울 수 없습니다. 남부군의 본거지 지리산은 경부선, 전라선 철도와 주변 국도망이 연결된 대한민국의 동맥이었습니다. 빨치산은 철도, 도로, 전력망을 파괴하고, 경찰서를 습격해 방화했습니다.
호남 곡창지대와 이어져 있고 날씨도 따뜻한 지리산 일대는 은신처로 제격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을을 습격해 식량과 옷, 각종 물자를 약탈하는 ‘보급 투쟁’으로 의식주를 해결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후 퇴로가 끊겨 고립된 북한군 1만여 명,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입산했다가 6·25 이후 북한군 전위대가 돼 학살과 보복을 일삼은 구빨치산, 김일성이 추가로 침투시킨 유격대가 모두 지리산 일대로 모여들었습니다. 장비 수준도, 전투력도 정규군에 필적했습니다.
1951년 5월 중순 이들은 조직을 통합해 ‘남부군’으로 명명하고, 신출귀몰하다는 이현상이 남부군 사령관이 됩니다. 이현상은 인천상륙작전 후 북상하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다시 지리산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동으로 의령, 서로 고창, 남으로 보성, 북으로 금산까지 영호남 일원의 지리산 일대는 ‘빨치산 왕국’, ‘대한민국 안의 김일성 나라’였습니다.
1951년 8월 말에는 태백산 지구(동해안 강원·경북) 빨치산 3000여 명(무장공비 766명, 비무장공비 3076명 추산)까지 지리산 지구로 남하했다는 정보가 입수됩니다. 9월 말부터는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납치가 잦아졌습니다. 11월 3일에는 빨치산 300여 명이 산청군 내대리에서 추수한 곡물을 약탈해 갔고 11월 29일에는 하동군 악양면을 3일간 점령하고 주민 1000여 명과 1년 치 식량, 소, 돼지까지 끌고 갔습니다.
등 뒤의 적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11월 중순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이 강릉의 백선엽 1군단장을 긴급 호출합니다. 백선엽은 대한민국을 지킨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의 영웅이었습니다.
“빨치산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규모가 2만명이라는데 토벌에 몇 개 사단이 필요한가?”
“2개 사단이면 충분합니다. 대신 사단은 직접 선정하게 해주십시오.”
백선엽은 송요찬 준장의 수도사단과 최영희 준장의 8사단을 골랐습니다. 둘 다 훗날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용장들이었습니다. 11월 26일 ‘백(白)야전전투사령부’가 창설됩니다. 국군 역사상 지휘관의 이름을 딴 첫 부대였습니다. 벤플리트가 한국군 에이스 백선엽을 찍어 지리산으로 보낸 것은 이곳이 38선보다 더 절박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백선엽은 1949년 겨울 5사단장으로 이현상의 지리산 빨치산(2병단)을 초토화(사살 365명, 생포 187명, 귀순 4964명)시킨 전적이 있었습니다. 1951년 겨울은 백선엽과 이현상의 2년 만의 리턴매치였습니다. 백선엽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빨치산 토벌은 주민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당시 국군은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희생시킨 사건들로 평판이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대한민국에 총구를 돌리는 빨치산은 용서할 수 없지만, 돌이키고 귀순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빨치산에는 강제로 끌려갔거나, 빨치산이 된 가족을 돌보려고 함께 입산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셋째, ‘토벌 과정에서 양민을 분리하고 무고한 피해자가 없게 해야 한다.’ 교전 외에는 절대 함부로 살상하지 말라는 엄격한 지침이 백야전사령부 예하 부대에 하달됐습니다.
백선엽은 남부군의 위세가 대단해 보여도 화력과 보급이 훨씬 우세한 정규군을 당할 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2만명이 넘는다지만 실제 전투병력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겨울은 빨치산에게 위기의 계절입니다. 활엽수가 많은 지리산의 숲이 옷을 벗어 은신이 어렵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게 되기 때문입니다. 백선엽은 1949년에도, 1951년에도 겨울에 작전했습니다. 벤플리트 미8군사령관 역시 그리스에서 반군 게릴라를 소탕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도 시간은 정규군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체 작전 계획도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작전명은 ‘쥐잡이’(Operation Rat Killer)였습니다.
1951년 12월 8일 백야전사령부의 제1기 작전이 시작됩니다. 7일간 계속된 작전은 남부군의 본거지 지리산 소탕 작전이었습니다. 8사단은 양구에서 내려가 지리산 북쪽으로, 수도사단은 마산과 여수에 상륙해 지리산 남쪽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동은 밤을 틈타 비밀리에 이뤄졌습니다. 군의 움직임이 누설되지 않도록 민간 전화선까지 끊었습니다. 전투경찰 3개 연대와 국군 3개 예비 연대는 2선에서 지리산을 포위했습니다. 이에 앞서 12월 1일 0시를 기해 부산과 대구를 뺀 대전 이남 전 지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마침내 지리산 전역에서 토벌이 시작됐습니다. 국군 장병들은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 빨간색과 흰색 표지를 등에 붙이고 산속 깊숙이 침투했습니다. 남부군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위장에 능했고 치밀한 연락망으로 공격을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국군은 일반인의 발길이 닿지 않던 천왕봉 등 동부 능선의 험한 골짜기까지 샅샅이 훑으며 빨치산을 격퇴해 나갔습니다. 백선엽은 매일 미군 세스나 경비행기로 지리산 상공에서 작전 상황을 직접 시찰했고, 빨치산이 탐지되는 곳마다 공군 전투기가 출격해 폭격했습니다. 치밀하게 펼쳐진 제1기 작전으로 무려 2500명의 빨치산이 사살됐습니다(유엔군 보고). 전 세계 대(對)게릴라 전사에 남을 만한 전적이었습니다.
귀순자도 전례 없이 많았습니다. 국군은 무조건적 사살을 자제하고, 선무 공작에 힘쓰면서 빨치산 생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리산 전역에는 도쿄 유엔사령부에서 제작된 백선엽 사령관 명의의 ‘귀순 허가증’ 전단 천만 장이 뿌려졌습니다. 유엔군사령부에서 파견된 방송팀은 귀순을 촉구하는 라디오와 확성기 방송을 했습니다. 귀순하거나 생포된 빨치산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국군은 이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하산하면 죽는다는 거짓말에 고민과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포로가 되었다. 국군은 천만 뜻밖에도 나를 따뜻하게 우대해 주었다. 나는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국군들은 ‘너희들은 살았다. 왜 여태까지 산에 있었니. 고생 많이 했지? 배고프지?’ 한다. 건빵을 주고 따뜻한 밥을 주고 담배를 주고 치료를 해주며 온정을 베푼다. 나는 부끄럽고 감개무량했다.” (지리산 빨치산 참회록 <어머니, 고향, 그리고 조국> (한국전쟁기념재단, 2013) 중)
남부군의 예봉은 꺾였지만 완전치는 않았습니다. 지리산은 워낙 넓었고, 빨치산 주력 부대인 전남도당과 전북도당은 포위망 사이의 허점을 뚫고 주변 산악들로 도주했습니다. 쉴 틈 없이 백야전사령부는 12월 19일부터 제2기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혹한 속에 오랜 기간 산속을 누빈 국군의 고통도 심했지만, 게릴라 토벌의 성패는 적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데 달려 있었습니다. 지리산은 전남·북의 수많은 산악 지대로 이어져 있습니다. 제2기 작전 지역은 전남·북 전역에 걸쳐 있고 민간인 마을도 많았습니다. 백야전사령부는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여분의 군용 물자도 민간에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주민들의 협력과 제보는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반면 궁지에 몰린 빨치산은 민가를 무차별 약탈해 민심을 더 잃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단은 전투력이 강한 전북도당 빨치산이 숨어든 장안산(지리산 북쪽 전북 장수)을 포위하고 12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치열한 공격을 벌여 790명을 사살하고 478명을 생포했습니다. 8사단도 회문산(지리산 북서쪽 전북 순창)과 서쪽으로 이어진 내장산을 공격해 417명을 사살하고 851명을 생포했습니다. 회문산 일대 빨치산 ‘해방구’ 마을들에서는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순창으로부터 15km 정도 떨어진 지점부터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말로만 듣던 해방구였다. 마을에는 인공기가 높이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고, 한지 제조제조 공장과쇄소, 인민학교까지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책에는 ‘부산이 곧 함락된다’는 등 허황된 내용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온 주민들은 우리가 국군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 ‘어떻게 왔느냐’고 물을 정도였다.”(당시 8사단 10연대 작전주임 이범준 대위 증언)
장안산과 회문산에서 패퇴한 빨치산들은 덕유산(지리산 북쪽 전북 무주)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군경은 끈질기게 추격했습니다. 해가 바뀐 1952년 1월 덕유산과 삼도봉, 황석산 일대에서 전북도당 주력 1000명이 사살 혹은 생포됐습니다. 1월 6일까지 18일에 걸친 제2기 작전이 끝날 무렵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빨치산 부대는 지리산의 81·92사단과 경남도당의 57사단뿐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산속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이었습니다. 양측 다 힘겨웠지만, 굶주리고 헐벗은 빨치산의 고통이 훨씬 심했습니다. 눈도 많이 내려 빨치산의 이동 흔적은 쉽게 포착됐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에는 이현상 직속 81·92사단이 남아 있었습니다. 빨치산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다시 지리산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습니다. 백운산(지리산 남쪽 전남 광양)에는 전남도당 빨치산이 집결했습니다.
1952년 1월 9일부터 31일까지 펼쳐진 제3기 작전은 이들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한 총공세였습니다. ‘타이거 송’으로 불린 송요찬의 수도사단은 지리산 동서남북의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공격했습니다. 민간인 선무에 능했던 최영희의 8사단은 주민들이 많은 야산 지대에서 빨치산을 공략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압도적 화력과 병력의 국군이 펼치는 횃불 시위에 빨치산들은 절망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1월 17일과 18일 대성골 전투의 대승으로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 등 300여 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생포됐습니다. 모스크바 고급당학교 출신 엘리트였던 32세 남경우는 귀순한 자기 호위병의 제보로 발각돼 사살됐습니다. 제3기 작전에서 모두 3500여 명이 사살되고 3000여 명이 생포됐습니다. 패전을 거듭한 이현상은 겨우 목숨은 부지했지만 부대라고 할 수도 없는 인원으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습니다.
이어 2월 4일부터 27일까지 지리산 인근의 잔당을 소탕한 제4기 작전으로 백야전사령부의 임무는 종결됐습니다. 총 7000여 명을 사살하고 6000여 명을 생포한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우리 군의 보급선을 끊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던 남부군은 궤멸됐습니다. 잔존 세력은 산속에 숨어 있다 가끔 부락을 약탈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백선엽은 지리산 작전 중이던 1952년 1월 13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우리 군 역사상 두 번째 중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달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미국 고위 무공 훈장인 은성 훈장을 받았습니다. 7월에는 32세 나이에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돼 전군을 지휘했습니다.
이현상은 1953년 7월 6·25전쟁 휴전 때까지 살아남았지만, 휴전 직후 김일성이 남로당을 숙청할 때 자기 휘하에 있던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에게 평당원으로 강등당했고 9월 17일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로 등 뒤에서 사격한 것이어서 같은 빨치산에 의해 사살됐을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나이 48세였습니다.
백선엽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나 일시적 오판으로 빨치산이 됐지만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들이 새 삶을 살게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광주와 남원에 대규모 인도적 수용소를 만들어 빨치산들이 심신을 회복하고 갱생하도록 했고, 빨치산 고아들을 위해 육아원을 만들고 백방으로 지원했습니다. 이 육아원에서 자란 30여 명은 수십 년이 지난 2009년 어버이날 백선엽을 ‘대장 아버지’라고 부르며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물들였던 ‘피의 보복’ 악순환을 막기 위해 백야전사령부 전체가 노력한 것입니다. 그 결과 전향한 한 빨치산이 쓴 시는 공산주의와 전쟁의 광풍 속에도 사랑과 용서가 피워낸 한 송이 꽃을 보는 듯합니다.
<광명 얻은 사나이>
(전략)
내 딴은 가장 애국자로서 자처했었다.
무릎 위에서 재롱부리는 내 귀여운 아들아
그렇게도 어여삐 사랑하는 아내마저 다 버렸던 나...
조국과 인민을 위한다고?
혁명가란 이름 좋은 허울 아래
눈보라치는 설한에 얼어붙은 지리산 바위틈에서 잤으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야수의 생활이여
(중략)
조선 하나쯤은 다 불살라도 좋고 다 죽어도 좋다는
스탈린 정책의 끔찍한 야욕을 알았고
무고한 벗들을 반동이란 죄명을 씌워 학살하는
몸서리쳐지는 공산당의 독사 같은 본성을 알았다
나는 몸부림치며 울고 또한 울었었지
(중략)
놈들의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총살에 대한 공포, 절망의 신음
(중략)
아! 무서웠다
손을 들 적의 순간의 생의 애착
그러나
조국에 돌아온 그날!
- 지리산 빨치산 참회록 <어머니, 고향, 그리고 조국> 중
참고문헌 : <대한민국 근현대사시리즈>, <백선엽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어머니,고향,그리고 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