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7월 17일. 다음 날 사형 집행을 앞둔 남로당 거물 이중업이 용산 육군형무소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이중업은 바로 전해 여수·순천 사건을 촉발한 14연대 반란의 지령자이자, 박헌영 바로 아랫급인 남로당 거물 중 거물이었습니다. 다섯 달 전 이중업을 체포한 대공 수사관 김창룡은 밤중에 전화를 받고 놀라 일어나 “그게 사실이냐?”고 소리쳤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라 그런지 역사의 기록조차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이 비현실적 사건은 그러나 분명히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석 달 후인 10월 8일 자 서울신문은 이 사건에 대한 국회(제5회 15차 본회의) 대정부 질문과 답변을 보도했습니다. 윤치영 의원이 이중업 탈옥에 대해 질의하자 신성모 국방장관은 “제주 및 여수·순천 사건 책임자 이중업의 탈주 사건은 그 후로 그 자가 어디에 잠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잡히면 바로 총살할 것이다”라고 답변합니다. 이 사건을 국방장관이 답변한 것은 이중업이 군 수사 당국에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기 때문입니다. 이중업의 가장 무거운 죄는 신생 대한민국의 존립을 뒤흔든 14연대 반란 지령이었습니다.
이중업은 탈옥 다섯 달 전인 2월 25일 새벽 4시 홍제동에서 체포됐습니다. 군 대공수사관 김창룡 소령이 석 달의 추적 끝에 대어를 낚은 것입니다. 앞서 붙잡힌 남로당 군사부 고위 간부 김영식이 ‘목숨만 살려주면 해군책(남로당의 해군 책임자) 김모(일병 왕서방)의 주소를 대겠다’고 말해 김모를 쫓던 중 훨씬 더 거물인 이중업이 걸려든 것입니다.
체포 순간 이중업은 “내 이름은 이명근”이라고 주장하다 도주를 시도하기도 했고 “돈을 줄 테니 용서해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체포 당시 83만원이라는 거액(당시 노동자 월급이 수십 원 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상 1956년 2월 경향신문 ‘김창룡 수기’ 중) 그는 조사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비법성(불법성)과 독재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남로당의 전 기밀을 세상에 폭로하여 민족이 원하는 공산주의 말살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조선일보 1949년 4월 12일 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하자 사형수 이중업이 수감돼 있던 영등포 육군 형무소는 용산 미군 형무소(현 용산 미군기지 부지)로 이전합니다. 헌병사령부가 1952년 발간한 ‘한국헌병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 위수형무소였으며 8·15 후 미군 형무소였던 용산구 이태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중략) 이 당시는 창설 초기였으므로 경비력의 불완전함과 사병 교육의 불충분으로 말미암아 임무 수행에 지장이 막대하였는데 7월 17일 마침내 극렬 피의자 이중업이 탈옥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중략) 이 급보를 알게 되자 헌병사령관 이하 각급 간부가 집합해 즉시 수색본부를 설치, 대폭적인 수사를 개시하였으나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어수선한 과도기라 해도 어떻게 형무소 내 최대 거물이, 그것도 사형 집행 전날 감옥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이 비밀은 이중업의 최측근으로 탈옥 사건의 주범인 김형육이 1950년 3월 체포되면서 밝혀졌습니다. 김형육은 함흥 영생고보와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을 나온 엘리트로 당시 33살이었습니다. 체포 즈음 그는 공산주의에 큰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검거 48시간 만에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며 ‘자유고백서’를 썼고, 수사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그의 진술로 남로당 간부 50명이 붙잡혔고, 김형육은 그들을 직접 취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김형육이 기술한 ‘자유고백서’는 메가톤급이었습니다. 김창룡이 “몇 번이고 나의 눈을 의심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중업 탈옥의 전모, 여간첩 김수임의 정체, 열렬한 우익 행세를 하던 좌익 인물들의 활동상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김형육이 밝힌 이중업 탈옥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이중업이 체포되자 비서였던 김형육은 월북해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중업을 체포한 자는 살해하고,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이중업을 구출하라’고 지시합니다. 김형육은 남하해 수도경비사령부 법무관인 남로당원 구덕회 대위를 만납니다. 김형육은 구덕회의 협조로 법무부 장교라고 속이고 군복을 입은 채 육군 형무소를 세 번이나 시찰합니다. 1호실에 수감된 이중업을 만났을 때는 “이제 구출하러 올 것이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말없이 표정으로 전했습니다. 다음 포섭 대상은 육군 형무소에 근무하는 이등중사 조병옥이었습니다. 조병옥이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구덕회에게 입수한 김형육은 이중업의 여동생을 조병옥에게 붙여줬습니다. 미인계였습니다. 거액의 공작금과, 탈출 후 일체의 신분보장도 약속했습니다.
마침내 7월 17일 토요일, 밤이 깊어 형무소가 조용해지자 감방 보초근무를 맡은 조병옥은 이중업을 감방에서 꺼내 포승줄로 묶고 형무소 입구까지 데려갔습니다. 이중업은 복통 때문에 죽어가는 시늉을 했습니다. 조병옥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일등병에게 화를 내며 상관의 명령으로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위협해 문을 열었습니다. 형무소가 보이는 언덕까지 이동하자 약속대로 김형육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비한 한복을 이중업에게 입히고 중절모를 씌운 뒤 삽으로 땅을 파서 죄수복과 삽을 묻었습니다. 다시 이중업을 포승줄로 묶은 뒤 신당동 쪽으로 걸어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파출소 순경들은 정복 헌병과 사복 헌병이 죄인을 끌고 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내수동 23번지, 남로당원인 대학교수 김용봉의 집이었습니다. 이중업은 준비된 한약을 마시고 보혈 주사를 맞았습니다. 이 집에서 1주일 머무른 뒤 이중업과 조병옥은 명륜동 1가 32번지 이용원의 집 지하실로 옮겨 45일 동안 은신했습니다.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열성 당원이 지하실 입구를 지켰습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 이중업은 서울 옥인동의 여간첩 김수임의 집 2층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주한 미군 헌병사령관이자 한국 경찰 최고 고문관 존 베어드(John Baird) 대령의 애인인 김수임의 집은 넓은 정원에 파티홀을 갖춘 대저택이었습니다. 베어드 대령은 친척이라는 김수임의 말에 속아 이중업과 가족처럼 환담을 나누는 어처구니없는 일마저 벌어졌습니다. 미군정 실세가 수시로 드나들고,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파티하러 오는 김수임의 집에 탈옥 사형수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베어드의 운전수는 김수임의 의붓동생(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남로당원 최만용이었습니다. 이중업은 통금 시간이 되면 최만용이 모는 베어드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서빙고 제1연대 일대 등 서울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녔습니다. 10월 이중업은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머리를 미국인처럼 노랗게 물들였습니다. 키가 크고 눈이 쑥 들어간 얼굴인 이중업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마카오지로 만든 최고급 신사복을 입으니 마치 미국인처럼 보였습니다. 김수임은 개성(당시 남한 땅)의 어머니가 위독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미국 대사관의 지프차를 빌린 뒤 이중업을 미국인 의사로, 최만용을 조수로 가장해 개성까지 동행했습니다. 미국 대사관 표지가 달린 차에 탄 미국인 의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차는 개성을 지나 접경 지역인 황해도 배천에 못 미쳐 멈췄고 이중업은 뛰어내려 북으로 달음박질했습니다. 이중업의 이런 월북 과정은 나중에 체포된 최만용의 자백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등 중사 조병옥은 이중업보다 먼저 월북했습니다. 김형육은 그 후 두 번 월북했을 때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북한 각지를 돌며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선무 강연을 하러 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형육이 이중업 탈출극의 전모를 밝히면서 4년이나 완벽히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여간첩 김수임의 존재도 마침내 드러났습니다. 김수임은 1950년 3월 19일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됐습니다. 김수임은 베어드를 통해 빼낸 주한 미군 철수와 한국 경찰의 무장해제 등 남침에 가장 필요한 정보를 북한 정권에 넘겼고, 이중업의 탈옥과 월북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이중업을 체포한 자는 살해하라’는 김일성, 박헌영의 지령 역시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남로당은 김창룡의 청량리 셋집 근처에 점포를 얻어 놓고 출근길에 김창룡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남로당원 이용운을 시켜 8월 12일 경찰의 대공 수사 1인자였던 김호익 경감을 암살했습니다. 전향 후 남로당 척결에 큰 공을 세운 김형육은 6·25전쟁 발발 후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9·28 서울 수복 후 김창룡은 김형육을 찾기 위해 자기 이름을 써서 서울 곳곳에 벽보를 붙였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그가 북한군에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은 뒤 크게 상심했다고 합니다.
이중업의 탈주극은 기상천외해 보이지만 사실은 요로마다 돈으로 움직인 흔적이 엿보입니다. 남로당에는 늘 돈이 넘쳐났습니다. 돈으로 최고위급까지 각계 요인들을 포섭하고 조직을 관리했습니다. 이중업 자신도 천문학적 공작금을 주물렀습니다. 북한에서 매달 10㎏ 이상의 아편을 주문진과 포항을 통해 밀반입해 박세영, 이준철, 김재신, 김희진 등을 시켜 전국에 유통시켰습니다. 심지어는 인천항을 통해 싱가포르와 상하이까지 밀수출하기도 했습니다.(동아일보 1949년 4월 10일 자) 이중업 체포 후 남로당의 붕괴 속도가 빨라진 것은 돈줄이 끊긴 영향이 컸습니다.
월북한 이중업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1912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탈옥 당시 37세였습니다. 경복중에 다닐 때부터 공산주의에 빠졌고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법학부 재학 중 공산당 활동으로 5년간 복역했습니다. 이중영 또는 김창선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박헌영 콤그룹의 주요인물로 암약했고, 해방이 되자 남로당 핵심이 됐습니다. 박헌영 월북 후 남로당 빨치산 군사책으로 우익 요인 암살, 테러, 방화 등 온갖 동족상잔의 악행을 배후 조종했습니다. 1948년 10월초 이중업은 ‘여수14연대 남로당 조직책 지창수 상사가 반란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평양에 보고했습니다. 4.3사건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자 육본은 10월 15일 14연대 1개 대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이 전보는 14연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여수우체국에서 일하는 남로당원, 여수 인민위원장,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을 차례로 거쳐 이중업에게 보고됐습니다. 이중업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란 지령을 내렸습니다.
14연대의 반란을 시작으로 현대사의 비극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중업은 남로당 중앙조직부 책임자와 12개 전문부와 산하 23개 단체를 지도하며 남한 군,면,리 단위로 정보를 수집해 박헌영에게 전하고,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산하에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강화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바 남로당 특수부책임자 이재복에게 지령하여 여수순천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 1949년 4월 10일자)
이중업은 월북 몇 달 뒤인 1950년 6월 15일 이승엽의 지령을 받고 서울로 잠입합니다. 6.25 전쟁 시작 열흘 전이었습니다.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호언장담해 온 ‘남로당원 20만 명 봉기’를 위해 남침 직전에 내려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남로당 조직은 이미 궤멸된 상태였습니다. 조직과의 접선조차 실패한 이중업은 빈손으로 월북합니다.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박헌영 등 남로당계가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할 때 이중업 역시 숙청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