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베를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심사위원장인 빔 벤더스 감독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배우 배두나./AP연합뉴스

영화와 정치는 별개인가, 아니면 한몸인가. 지난 12일(현지 시각) 개막한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한복판에서 ‘정치 폭탄’이 터졌다. 개막 당일 불거진 이스라엘·가자 문제가 갈수록 커지며 영화인들이 집단 성명을 내고, 독일 언론까지 가세했다.

논란은 개막일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장에서 시작됐다. “가자 지구에서 자행되는 학살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심사위원장인 빔 벤더스 감독은 “영화인은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며 “영화인은 정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고, 정치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대변해야 한다”고 답했다. 발언이 알려지자 부커상 수상 작가인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예술이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발언에 경악했다”며 참석을 취소하는 등 반발이 일어났다.

이에 지난 15일 트리샤 터틀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홈페이지에 발표한 성명에서 “예술가가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답변해야 할 의무는 없다”며 “영화제가 침묵한다고 해서 영화인들이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라고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터틀 위원장의 발언은 오히려 기름을 부었다. 17일에는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 틸다 스윈튼, 마이크 리 감독 등 영화인 81명이 영화제 집행부를 비난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끔찍한 폭력에 대해 영화제 측이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본거지인 가자 지구에서 군사 작전에 들어가면서 민간인 6만6000명이 희생되자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져왔다.

이스라엘·가자 문제가 베를린국제영화제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영화제가 내세워온 정체성 때문이다. 베를린은 칸이나 베니스와 달리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밝혔으며, 사회적 연대와 저항을 강조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는 우크라이나 지지를 공표하고 러시아와 연계된 기관의 참여를 금지했다. 지난 2023년 개막식 때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러시아를 비판하는 화상 연설을 맡기고, 우크라이나 국기색인 파랑과 노랑 배지도 배포했다. 이란 히잡 시위 때는 이란 인권 문제를 영화제 핵심 의제로 삼고 이란 영화인이 정부를 비판하는 포럼도 열었다. 그런데 올해 이스라엘·가자 문제가 터지자 “영화와 정치는 별개”라고 말하는 행태는 이중 잣대라는 것이 비판 측의 주장이다.

공개 성명을 낸 영화인 81인은 영화제 주최 측이 예산 때문에 정부의 입맛에 맞추고 있다고 우려한다. 홀로코스트의 원죄가 있는 독일 정부는 이스라엘 지지를 공식 천명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예산의 40% 가량(약 1200만유로, 약 200억원)을 연방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영화인의 공개 성명은 이를 암시하며 “독일 정부의 예산을 받는 영화제 측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독일 언론도 둘로 갈라졌다. 정부 측 입장을 지지하는 빌트와 디 벨트는 “영화제가 이성을 찾았다” “예술가들의 정치 선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영화제가 영혼을 잃었다”(디 차이트), “이스라엘 보호라는 국가 이성을 문화계에 강요해 예술가들의 비판적 사고가 마비되고 있다”(쥐트도이체 자이퉁) 등의 시각도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오는 22일 폐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