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육군 총사령관이자 국군 최초의 장성인 인물이 있습니다. 경력으로 보면 ‘국군의 아버지’라 불려도 손색없지만 대한민국 국군은 그의 이름을 기록에서 삭제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송호성입니다. 송호성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1889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송호성은 일찍 중국으로 건너가 군벌 지휘관이 됐고, 광복군 훈련처장과 지대장(연대장급)을 역임했습니다. 55세였던 1945년 8·15 해방으로 귀국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의 후광을 업고 1946년 12월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국방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에 임명됩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국방경비대는 국군으로 개편됐고, 송호성은 초대 육군 총사령관이 됐습니다. 육군이 대한민국 군의 거의 전부이던 시절입니다. 그는 김홍일, 채병덕, 손원일, 이응준과 함께 국군 최초의 장성 5인 중 1인이기도 합니다.
1967년 국방부가 발행한 ‘한국전쟁사’는 송호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송호성은 중국에 있을 당시에는 송호(宋虎)라 하였다. 광복군 지대장이라는 마지막 직위를 가지고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정세를 관망하여 오다가 통위부장관인 유동열 장군의 권고로 경비사관(편집자 주: 육사 전신) 2기에 응시하였으나, 초등학교조차 이수하지 못하였고,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 중국군, 광복군으로 투쟁한 경력을 가졌을 뿐 시험 답안조차 쓸 수 없어 불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의 상관인 유동열 통위부장의 특별 배려로 1946년 10월 17일 소령으로 임관, 군번 156번, 제3연대장을 2개월 하다가 총사령관으로 등용된 것이다. 약 2년간 재임하면서 국방경비대를 확장하여 여단으로 편성하였고, 정부 수립 후엔 국군으로 개편되어 육군총사령관으로 개명되었다. 여수·순천 사건 시에는 총사령관 자신이 현지에 가서 진두지휘를 하면서 반란군 진압에 노력하였다.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그의 경력이 보완할 수 있었으나, 현대적 군대를 통솔하기에는 너무나 학식과 군사 지식이 없었다. 그가 2년간이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유동열 통위부장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호성의 비호자’로 기록된 유동열은 상해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해방 후 통위부장(국방부 장관 격)을 맡아 국군 창설에 기여했습니다. 6·25전쟁 때 납북됐고, 1950년 10월 18일 사망했습니다.
송호성에 대한 역사 기록은 두 가지 공통된 맥락을 보입니다. 첫째는 군인으로서의 무능함, 둘째는 이념적 모호성입니다. 국방경비대 사령관 재임 중인 1947년 1월 송호성은 육사 3기 입교 환영식에서 이렇게 연설합니다. “조선경비대(국방경비대)는 좌도 좋소, 우도 좋소. 누구든지 우익으로 자본주의 사상을 따를 수 있고 좌익으로 공산주의 이념도 가질 수 있으며 사상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경비대에서는 사상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될 것이오.”
공산주의의 위협을 최일선에서 막아야 할 군 최고사령관이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할 수 있었던 것이 해방 정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송호성 바로 뒤에 등단한 조병옥 미군정 경무국장은 ‘방금 송호성 장군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공산주의는 기만으로 가득 찬 허구의 철학에 의해 형상됐고 결코 인류의 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참석자들은 두 사람이 공개 석상에서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했다고 이치업 전 육사 교장은 회고했습니다. 이날 입교한 육사 3기는 임관자 281명 중 무려 60여 명이 남로당계로 판명돼 숙군됐습니다. 여수·순천사건 주동자 김지회, 홍순석, 군의 남로당계 핵심 김남근, 김응록 등이 모두 육사 3기였습니다.
이념적으로 모호하고, 군인으로서 실력이 없는 송호성은 같은 광복군 출신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송호성과 함께 광복군 지대장을 했고 훗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장관이 된 철기 이범석 장군은 나이가 11살이나 위인 송호성을 백안시했습니다. 이범석은 송호성이 육사 교장이던 1947년 12월, 생도 분열식을 앞두고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는 단을 내리라!”(사열대에서 내려가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것입니다.
남로당계 숙군의 주역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남긴 비밀 일지는 송호성의 정체성에 대해 더 짙은 의혹을 갖게 합니다. 남로당계 숙군 수사에서 제일 먼저 적발된 사람이 초대 군감사령관(군 감찰을 맡은 부대장) 이병주 소령입니다. 당시 군에서 소령은 매우 높은 계급이었습니다. 이병주가 징역 5년형을 선고받자 김창룡은 이를 보고하러 송호성 사령관에게 들어갑니다. 그러자 송호성은 김창룡에게 치하는커녕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너는 어디 놈이냐, 조선놈이 조선놈을 잡아서 징역시키는 법이 있느냐. 공산당도 잘 설교를 시켜서 쓰면 된다.”
김창룡은 남로당계 장교들 구속영장을 재가받으러 갔을 때 몇 번이고 거부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최고사령관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암만 해도 이상했다. 공산당의 동정자인가, 공산당원인가, 아니면 공산당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던가’라는 심경을 비밀 일지에 기록했습니다.
김창룡의 이런 심증에는 점차 물증이 더해집니다. 1948년 12월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이 체포됩니다. 이재복의 집 천장에서 압수된 남로당 문건 중에는 송호성이 남로당에서 공작금 70만원(현재 화폐 가치로 수억 원 이상)을 받은 영수증이 들어 있었습니다. 남로당의 국군 침투에 핵심적 역할을 한 레포(연락책) 김영식도 이렇게 진술합니다. “송호성 사령관은 최남근 중령이 상경하면 파고다 공원 앞에 있는 한풍옥에서 최남근을 만나고 최남근의 짚차는 부근에 있는 송호성의 집에 대기시켰다.” 최남근은 남로당계 장교 중 수뇌부였습니다. 1949년 4월 박헌영의 핵심 측근 이중업이 체포됐을 때는 송호성이 남로당 상부에 2백만 원을 요청한 호소문이 압수됐습니다. ‘2백만 원을 내려보내 달라. 공작금 없이는 일대 지장을 가져올 것이며 김삼룡이 지령하는 인사도 부자유하다.’
이후 체포된 남로당원 강병도도 송호성이 남로당과 연락하고 있었다고 진술합니다. 강병도는 ‘송호성이 대전 2사단장으로 있을 때부터 연락하고 있었고, 연락책 양성홍이 검거돼 연락이 끊어진 뒤 양성홍의 부친 양지환을 통해 연락하려던 도중 송호성이 파면됐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는 모두 김창룡의 비밀일지에 기록된 내용이어서 사실이라고 100%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창룡은 이런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고 자신의 비밀일지에만 기록해 놓았습니다. 누구를 음해하려는 목적이 아닌,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김창룡의 비밀일지는 그가 암살된 뒤인 1956년 2월 경향신문이 보도하면서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김창룡은 “남로당원들이 유죄 언도를 받았을 때 송 장군은 나에게 적지 않은 노여움을 표명하였다. 그 후 나는 전후 여섯 차례에 걸쳐 전속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괴로웠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당인데, 송 장군은 왜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한편 노엽기도 하고 한편 괴롭기도 했다. 나는 후에 알 수 있었다. 알고 놀랐다. 당시의 사령관 송호성 장군이 적색 계열과 연락이 있다는 것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8년 10월 송호성은 육군 총사령관으로 여수·순천 사건 진압을 현지에서 지휘하다 반란군의 공격에 고막이 터진 채 서울로 돌아옵니다. 송호성은 잘 들리지 않게 된 귀를 흔들며 신문기자들 앞에서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1948년 10월 31일 자 조선일보는 송호성의 이런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동족상잔 참극을 보고 얻은 것은 눈물뿐이다. 반란은 거의 진압돼 치안을 회복해 가고 있다. 나이 어린 학생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총을 쏘는데 입장이 참 곤란했다. 일반 주민이 폭도화한 것은 좌익 계열이 교묘하게 남조선은 좌익이 잠식하고 인민공화국을 세운 듯 기만하여 선동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상잔을 살펴보면 주의 주장보다 일상에 쌓이고 싸였던 사감정을 폭발시킨 것이 많다.”
다음 달 송호성은 육군 총사령관에서 물러납니다. 그다음 달인 12월에는 남로당 군사부 총책임자 이재복이 체포됩니다. 김창룡의 일지대로라면 송호성이 남로당 공작금을 받은 영수증이 발견된 때입니다. 1949년 1월 21일 자 조선일보는 송호성이 주중 한국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하게 됐다고 보도합니다. 이틀 뒤 경향신문은 송호성의 중국 부임이 시국 사정에 의해 보류됐다고 보도합니다. 정확한 전말과 인과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송호성은 두 달 뒤인 3월 19일 예비군 격인 호국군 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갔다가 신설된 광주 5사단장, 대전 2사단장을 거쳐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군복을 벗고 예편합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송호성은 피란 가지 않고 서울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부하였던 장흥 전 헌병사령관이 집까지 찾아가 ‘정부를 따라 남하하자’고 설득했지만 끝내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채병덕과 이범석에게 군에서 밀려났다는 불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 있던 7월 4일 그는 이승만 정부를 비난하고 북한 인민군을 옹호하는 방송 연설을 합니다. 김일성 정권의 요구에 응해 방송 연설을 한 남한 주요 인사 가운데 가장 먼저였습니다.
“나는 인민군대가 인민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군대라는 것과 인민정권은 조선인민을 위한 정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됐다. 국군 장병들과 삼천만 동포들은 나를 본받아 인민군과 빨치산으로 넘어와 총부리를 돌려 인민의 원수 미 제국주의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조선인민보 1950년 7월 5일자 보도)
송호성의 연설이 협박 때문이라는 일부의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년여 전 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사람이 적군 치하의 서울에 그냥 남은 것도, 방송 연설 후의 행적도 그런 논리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그는 인민군의 후퇴 때 북한으로 따라갔고 1953년에는 국군 포로들로 구성된 인민군 부대인 22여단(해방전사여단) 여단장을 맡아 국군과 싸웠습니다. 남로당 숙군 때 월북해 버린 대대장 출신 강태무, 표무원도 이 부대 소속이었습니다. 송호성은 ‘의거 입북자 군사정치학교장’도 지냈습니다. 6·25 남침 5주년인 1955년에는 6·25가 남한의 북침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민족적 통일 독립과 평화 위업 달성을 기본 목표로 삼는 공화국에 들어온 것을 참으로 행복하게 생각한다”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간 남한 출신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송호성의 말로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의해 국제 간첩 혐의 및 반혁명 분자로 체포된 뒤 1958년 낭림산맥의 오지인 평남 양덕에 유배돼 살았고, 1959년 3월 24일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소련과 김일성, 박헌영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해방 정국에서 ‘좌도 좋고, 우도 좋다’고 말하던 국군 초대 총사령관의 최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