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16일 한국 광부들을 서독으로 파견하는 공식 협정이 한국 노동청과 서독 탄광협회 사이에 체결됐습니다. ‘35세 미만의 신체건강하고 병역을 필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는 조건으로 선발된 1진 광부 123명이 1963년 12월 21일 서독으로 떠났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그들의 존재는 ‘한강의 기적’의 동력이었고, 한국인의 근면,성실성을 세계에 처음 알린 전령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로부터 1년 뒤인 1964년 12월 10일. 독일 중서부 루르(Ruhr) 공업지대의 핵심 탄광인 함보른(Hamborn) 탄광을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가 방문했습니다. 루르는 ‘라인강의 기적’의 심장인 공업지대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수도 본에서 정상회담 등 국빈방문 주요일정을 마친 뒤였고, 하인리히 뤼브케(Karl Heinrich Lübke) 서독 대통령도 이례적으로 동행했습니다. 함보른 탄광 체육관 앞에는 여러 탄광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온 한국 광부 대표 500여 명이 신사복을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고, 인근 뒤스부르크와 에센 간호학교 등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50여 명도 색동저고리 차림으로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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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40분 박 대통령이 도착해 대형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며 울려 퍼지던 합창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부터는 목멘 소리로 바뀌었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울음바다가 돼 가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취재하던 기자들도,독일인 탄광회사 사장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즉흥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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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우리 동포 여러분, 이역만리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을 감개무량하게 생각합니다.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수일 전에 와서 독일의 여러 분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분들보다도 가장 모범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모든 둑일 국민들에게 아주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뻤습니다.(중략) 우리가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모든 국민들이 단합하고 조국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경주한다면 불과 수년 내에 우리나라도 새로운 근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자중자애하고 특히 건강에 조심하고 여기서 일하는 동안 무사히, 건강한 몸으로 생활하다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광부 대표 유재천씨는 ‘이국만리에서 대통령을 만나니 마치 친부모를 대하는 듯 감개무량합니다. 이국의 하늘 아래 수천 척 지하에서 피와 땀으로 바꾼 우리의 외화가 조국 번영의 초석이 되고 조국의 무한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답사했습니다. 행사가 끝났지만 대통령 내외도, 광부와 간호사들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장내는 눈물바다였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조국의 대통령이 먼 곳까지 자신들을 만나러 와준 것에 놀랐고, 대통령 방문 이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산업전사로서 성실히 일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드높아졌다고 말했습니다.(파독광부 출신 권이종 전 교원대 교수 저 ‘막장 광부, 교수가 되다’ 중)

젊은이들의 손을 일일이 맞잡고 격려의 말을 건넨 뒤 차에 탄 박 대통령은 차 안에서도 ‘내가 죄인’이라며 눈물을 훔쳤고, 옆자리에 앉은 칠순의 뤼브케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47세인 박대통령의 눈물을 직접 닦아 줬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해서 경제부흥을 이룹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동승한 백영훈 통역관(9,10대 국회의원)은 겨우 통역을 마친 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그날 대통령과 광부,간호사들이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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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통역관 백영훈은 해방 후 한국인으로서는 독일 대학의 경제학 박사 1호였고, 광부와 간호사 파견을 이뤄낸 산파이기도 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와 6.25 남침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1955년 방한한 유엔 한국재건위원회(UNKRA) 특별조사단장 벤가릴 메논은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 한국에서 희망이란 허황된 꿈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영국 런던타임스는 메논의 이 말을 기사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더구나 5.16군사정변 직후 케네디 미국 정부는 박정희를 인정하지 않고 원조를 중단했습니다. 1962년 1월 박정희 정부는 야심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지만 종잣돈이 없는 개발계획은 종이조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정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서독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분단국가이자, 전쟁의 참화 위에 경제를 재건한다는 두 가지 강력한 공통점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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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차관 교섭단을 서독으로 급파했습니다. 교섭단에 포함된 백영훈(당시 중앙대 교수)은 서독 유학 시절 은사를 통해 재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애걸하다시피 끌어냈고,끈질긴 설득 끝에 1961년 11월 2일 3000만 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차관 제공 협약이 체결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급보증이 새로운 장벽으로 떠올랐습니다. 서독 정부에서 돈을 빌리려면 제3국 은행의 지급보증 이행 약속이 있어야 했습니다. 가난하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대한민국에 지급 보증을 해 줄 외국 은행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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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국과 서독이 찾아낸 해법이 광부와 간호사 파견이었습니다. 차관 제공 대가로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고, 그들의 첫 월급을 담보로 간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서독은 산업화의 주연료인 석탄을 캘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전쟁에서 많은 청년이 목숨을 잃었고, 이웃나라에서 온 근로자들은 지하 천 미터 이상 내려가 최고 40도의 고열 속에 탄을 캐는 작업을 며칠을 못 버티고 떠나기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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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명문대를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 힘든 실정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10%가 실업자였습니다. “독일 갱도가 힘들었지만, 실업 청년이 넘쳐나던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방향을 알 수 없는 갱도와 같았다.”고 파독 광부 출신 권이종(전 교원대 교수)은 회고했습니다. 파독 광부의 월급 700마르크는 당시 우리나라 5급 공무원 월급의 10배인 4만원 정도였습니다. 서울의 집값이 45만원 수준이었으니 1년만 일하면 서울에서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대졸자와 전직 교사,장교들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일 파견을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체력검사, 영어와 국사 등 필기시험, 면접까지 통과해야 10:1에 가까운 선발 경쟁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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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1979년까지 8천여 명의 광부, 만 천여 명의 간호사들이 3년의 근무기한으로 서독에 파견돼 일했습니다. 이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천만 달러 가량으로 한때 대한민국 GNP의 2%에 이르렀습니다. 1965년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송금액수는 우리나라 상품수출액의 10.5%, 무역외 수입의 14.6%를 차지했습니다. 서독 정부가 우리나라에 제공한 차관도 1982년까지 5억 9천만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인적 자원이 우수했지만 경제를 일으킬 자본이 없었던 시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은 대한민국의 젖줄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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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은 새벽 5시면 일어나 지하 1-3천미터의 좁은 갱 속에서 온 몸이 땀과 탄가루에 흠뻑 젖은 채 죽음의 공포를 이기며 일했습니다. 중장비에 몸이 끼고, 버팀목이 붕괴되고, 부러진 드릴이 튀어나오는 등 각종 사고에 목숨을 잃고, 손가락,발가락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실명하기도 했습니다. 막막함과 그리움에 탄광 안에서 혼자 ‘아리랑’과 ‘나의 살던 고향은’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파독 간호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맡은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딱딱하게 굳은 시신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간호사들은 모두 마다하는 궂은일을 도맡아 초과근무까지 해가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파독 광부 27명이 작업 중 목숨을 잃었고, 광부 4명, 간호사 1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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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난과 희생 속에서도 전 세계에 처음으로 한국인의 우수함과 성실성을 각인시킨 것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었습니다. 서독 언론은 유능하고 친절하고 봉사정신이 투철한 한국 간호사들을 ‘코리아의 천사들’이라고 극찬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국 광부들은 가난한 형편에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한국 문화를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윷과 한복 인형까지 짐에 싸서 서독에 입국했습니다. 학력이 높은데다 책임감 강하고 사건사고도 없는 한국 광부들을 서독인들은 ‘신사 광부’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에 대한 호평은 서독 정부가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공식 초청하는데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독이 아시아의 가난한 분단국가 정상을 국빈으로 초청한 것은 이례적이었습니다. 국적기조차 없던 시대, 박대통령은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일반 승객들과 함께 타고 중간기착지마다 모두 서며 28시간 만에 서독에 도착했습니다. 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차관 제공을 설득하며 한국 상황을 설명하다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죽고 있다”며 눈시울을 적셨고, 1949년부터 경제장관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잡고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당시 통역관 백영훈은 증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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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이 제공한 4700만 달러의 경제협력 차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나주 비료공장, 인천 한국기계,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등 여섯 곳을 기간산업 대상지로 지정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서독이 전후 제일 먼저 건설한 아우토반에 관심이 컸던 박 대통령은 두 번이나 아우토반 중간에 차를 세우고 건설과 관리에 대해 꼼꼼히 물어보고, 아우토반에 입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 고속도로 건설에 나섰고 1970년 7월 7일 경제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눈물로 시작된 ‘한강의 기적’은 서독 ‘라인강의 기적’을 뛰어넘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 시대 서독의 경제성장률은 연간 8%대였지만, 박정희 정부 시절 대한민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평균 10%, 최고 14%에 달했습니다. 서독은 세계대전을 겪었지만 사회 인프라와 자원이 이미 발달해 있던 ‘원래 선진국’이고, 대한민국은 식민통치와 전쟁에서 겨우 벗어난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한국만큼 경제가 성장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세계경제의 총아였던 일본도 1970년대에는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성장률이 5%대로 떨어졌습니다.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린 싱가폴,홍콩,대만은 경제규모가 우리보다 훨씬 적고, 국방비 부담도 우리와 비교할 수 없게 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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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가 출범한 1961년 82달러였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박대통령 임기 마지막해인 1979년 1636달러로 무려 20배가 됐습니다. 가정경제로 치면 연봉 천 만원이던 최저생계계층이 연봉 2억원의 고소득 계층이 된 셈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기적입니다. 그 바탕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실과 근면의 정신, 그리고 정확한 전략을 수립하고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은 박정희 정부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