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김달삼이 이끄는 남로당 무장 조직 제주인민유격대가 경찰서와 마을을 습격해 경찰관과 우익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실상 4·3사건 인명 피해의 대부분은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10월부터 발생했습니다. 2대 사령관 이덕구가 인민유격대를 이끌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덕구는 누구일까요. 왜 그토록 어마어마한 비극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4·3사건이 시작된 4월 3일부터 7월 20일까지 경찰관 56명, 우익 인사와 그 가족 235명이 인민유격대에 참혹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진압에 나선 경찰,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와 교전해 인민유격대원 28명도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인민유격대가 아닌 양민이 목숨을 잃은 경우는 한 명도 없었고, 국군 희생도 없었습니다(노무현 정부 발간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 암살한 박진경 연대장이 재임하던 5월과 6월에도 양민 희생은 전무했습니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로 진압 작전이 강화되자 김달삼은 산속에 숨어 있다 8월 2일 제주 성산포항을 통해 탈출해 월북합니다. 김달삼은 8월 21~26일 열린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주도 사건에 대해 이렇게 보고해 열광적 갈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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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군이 총동원됐습니다. 반동의 거점인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하여 악질 경관 10명과 11명의 테러단 서청원(서북청년단원), 그리고 악질 반동 등 10명이 인민군의 애국 정신에 불타는 정의의 총칼 앞에 제거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 경관 100여 명, 반동 400여 명이 숙청되었습니다.”

김달삼은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8월 15일 이후입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입니다. 김달삼의 이런 연설 내용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 소장돼 있는 북한에서 노획된 문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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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월북한 대의원과 북한에서 흑백함 선거로 선출된 대의원들은 9월 2일 평양에 모여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엽니다. 김달삼은 여기서 49명으로 구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에 선출되고, 국기훈장 2급 훈장을 받습니다.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박헌영, 홍명희, 김책을 부수상으로 하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습니다.

김달삼이 4.3사건 ‘공로’를 앞세워 북한 정권 핵심으로 진입하는 사이, 제주 인민유격대는 김달삼이 무기를 지원받아 다시 내려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남한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 대정면 남로당 책임자였던 이운방은 제주4.3연구소가 펴낸 ‘4.3증언 자료집-이제사 말햄수다’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인민의 군대는 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고, 인민의 군대가 오면 이승만 세력은 곧 무너지고 조국 통일은 금방 될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활동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확신이 있으니까 일을 한 것이지, 그런 낙관 없이 어떻게 일을 하겠나. 이남을 해방시키는 것은 의무인데, 왜 더 빨리 인민군이 내려오지 않는가 생각했다. 밀항선을 이용하고 김달삼을 안내인으로 한다면 무기, 탄약의 원조쯤은 그리 곤란한 일도 아니었는데, 무기의 원조는커녕 지도자까지 눌러두고 있었으니 제주 유격대 측의 입장에 선다면 더욱 괴상스러운 처사라 아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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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무기 공급도 없었습니다. 남침은 스탈린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경쟁자 박헌영이 주도하는 남한 폭력 투쟁에 대한 김일성의 계산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고립된 제주 인민유격대는 이덕구를 2대 사령관으로 추대합니다. 김달삼과 이덕구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제주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일본군 장교가 됐고, 둘 다 귀국 후 교사를 했습니다. 조천면 신촌리 부잣집 셋째 아들인 이덕구는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교토에 있는 리쓰메이칸 대학 재학 중 입대해 일본이 만주 침략을 위해 창설한 관동군 소위가 됐습니다. 해방 후 귀국해 좌익 계열 인민위원회의 조천면 민정 책임자가 됐고, 1946년 3월 좌파 주도로 만든 사립학교인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 교사로 있었습니다. 1947년 남로당이 미군정과 충돌한 3·1 사건으로 검거돼 옥살이를 하다가 1947년 여름 돌연 자취를 감춥니다. 조천면 사돈 집에 숨어 지내던 그는 남로당 간부회의 도중 검거됐다 풀려난 뒤 한라산에 입산했고 4·3 사건 발발 후 김달삼 밑에서 행동대장으로 있다가 김달삼의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

진압된 줄 알았던 4·3 사건의 불길은 이덕구가 사령관이 된 뒤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북의 원조가 끊기고 국군의 토벌 작전으로 숨통이 조여오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돌격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당시 남로당원들은 증언했습니다.(‘이제사 말햄수다-4.3증언자료집’) 이덕구의 인민유격대는 1948년 9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에서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원 문두천을 흉기로 난자해 학살합니다. 17일에는 김녕리의 경찰지서에 방화했고, 18일 성산면 민보단장 김만풍과 오만순을 학살합니다. 10월 1일 중문면 도순리의 경찰관 5명을 살해하고 2명을 납치했습니다. 같은 날 도남리에서 인민유격대 토벌에 앞장섰던 주민 정익조, 정병택 부자와 김상혁을 학살합니다. 10월 6일에는 국군, 경찰과 차례로 총격전을 벌여 국군 1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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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투쟁이 다시 격화되자 출범한 지 두 달도 안 된 대한민국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토벌을 재개했습니다. 9연대 1개 대대, 6연대 1개 대대, 5연대 1개 대대, 그리고 해군 함정과 제주경찰대가 투입됐습니다. 여수에 주둔하는 14연대 1개 대대도 제주로 파견하려 했지만 이를 거부하는 남로당 장병들이 10월 19일 ‘14연대 반란 사건’을 일으켜 여수·순천 사건으로 확대됐습니다. 14연대 반란군과 좌익 세력이 전남과 전북 전역을 휩쓸자 제주인민유격대의 기세는 등등해졌습니다. 이들은 금방이라도 국군 내 좌익 세포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북한 인민군이 이에 호응해 남침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주 4연대, 마산 15연대, 군산 12연대, 대구 6연대에서 남로당 장교들의 크고 작은 반란이 잇따랐습니다.

사기가 오른 이덕구는 10월 23일 제주시가에 사격을 가하고 제주 북방 50여 곳에 봉화를 올렸습니다. 북한 조선인민공화국 국기가 제주도 곳곳에 게양됐습니다.(재(在)조선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기록) 다음 날인 10월 24일은 소련이 공산 정권을 수립한 ‘10월 혁명 기념일’이었습니다. 이덕구는 이날을 기해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제주인민유격대 총책임자 이덕구 명의로 ‘괴뢰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과 토벌군 및 일체의 통치기관에 대한 ‘호소문’이 살포됐습니다. 호소문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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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부터 쫓아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악당을 반대하기 위해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내 나라, 내 부모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김봉현·김민주) 중)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정부라고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했으니 이는 명백한 내란입니다. 선전포고는 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인민유격대는 11월 2일 한림에 주둔한 국군 9연대 2대대 6중대와 3중대를 공격해 국군 21명이 전사했습니다. 11월 5일 새벽 3시 경찰 중문지서를 습격하고, 월동 준비를 위해 면사무소의 양곡을 약탈했습니다. 10월 28일 조천면 신흥리에서 만삭의 임신부 김순옥 등 4명을 학살했습니다. 11월 11일에는 신엄지서를 습격한 뒤 우익 주민 김여만의 어린 딸들까지 가족을 몰살시키고 가옥 80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제주도 내 4개 경찰서 등 전 관공서를 공격하고 우익 인사, 사회단체 간부들을 모두 살해해 제주도를 ‘인민공화국화’하겠다는 ‘11.7 적화 음모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이날 이덕구는 서귀포경찰서를 공격하고 가옥 70여 채에 방화했습니다. 그러나 제주경찰서 구내 이발소 직원으로 위장했던 남로당 프락치 서용각이 남로당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고 이 계획을 폭로하면서 음모는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서용각의 고발로 경찰관 11명 등 제주도청·법원·읍사무소·해운국에 포진해 있던 남로당원 75명이 검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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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공산화의 위기에 직면한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2월 31일까지의 계엄 선포 기간 동안 인민유격대는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인민유격대에 협조한 주민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까지 검거하거나 즉결 처형하는 사례도 급증했습니다. 복수심에 눈이 먼 일부 지휘관은 양민을 무차별 처형했습니다. 양민들은 인민유격대에 협조하지 않았다며 학살과 방화를 당했고, 토벌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토벌군이 인민유격대 차림으로 들이닥쳐 좌익을 죽이기도 하고, 인민유격대가 토벌군 복장을 입고 나타나 우익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비통함과 억울함에 사무친 통곡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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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양민의 안타까운 희생에 대해서는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를 배상하고, 억울함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참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1948년 10월 이덕구의 인민유격대가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국군을 공격하는 반란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인민유격대가 국군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계엄령도, 강경 진압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산화시키려고 국군을 공격하고 양민을 학살한 이덕구 등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죄과는 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세에 몰린 산사람들이 하산하기 시작하고, 1948년 12월에는 이덕구의 경호원인 17세 오현중학교 학생 김정진이 자수합니다. 함병선 2연대장은 김정진의 안내로 어승생악을 수색해 인민유격대 병기창과 보급창에서 소총 370정과 실탄 수천 발을 노획했습니다. 이로써 제주읍을 다시 공격하려던 이덕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12월 31일 계엄은 해제됐지만 한라산에는 유격대 500~600명, 그리고 비무장 동조자 1000~1500명이 잔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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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오동리, 6일 명덕리, 12일 의귀리에서 국군과 인민유격대의 대규모 전투가 계속됐습니다. 3월 9일에는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국군 36명이 전사한 노루오름 전투도 벌어졌습니다. 3월 말 이덕구는 안덕면 면사무소와 지서에 방화한 뒤 국군이 출동하면 빈 군기지를 습격해 무기·탄약·식량·피복을 탈취하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서에 방화한 뒤 귀환이 늦어지는 바람에 새벽 4시경 녹하악 고갯마루에서 국군과 조우해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국군은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오전 11시까지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퇴했습니다. 이것이 이덕구의 최후 격전인 녹하악 전투입니다. 천여 명의 인민유격대 최대 병력이 동원된 이 전투에서 178명이 사살되고, 소총 203정을 빼앗기면서 이덕구는 재기불능 상태가 됐습니다.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이덕구는 비밀리에 하산을 시작합니다.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해 지리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과 합류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견월악 부근 제주읍 용강리 북받친 밭에서 경찰에 발각돼 포위됐습니다.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 등 경찰관 5명과 민보단원 5명이 이덕구를 포위하고 자수를 권유했지만 이덕구는 총격을 시작했고 경찰의 집중사격에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시 나이 29세였습니다. 생포된 경호원 양생돌의 주머니에서는 이들의 극비 문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이 문서에는 남로당의 폭력 투쟁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어 4.3 사건이 민중 항쟁,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귀중한 증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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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이덕구의 시신을 제주읍 중심지인 관덕정 광장에 십자형 틀에 매달아 모든 도민에게 공개했습니다. 입고 있던 군복 왼쪽 가슴에는 이덕구가 늘 꽂고 다니던 숟가락이 그대로 꽂혀 있었습니다. 4.3 사건의 사실상 종언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헌법재판소는 “제주 4·3 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지지하는 공산 무장 세력이 주도한 반란 사건”이라고 재판관 전원일치로 결론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