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을 맞는 박헌영과 남로당에는 위기감이 팽배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려고 일으킨 제주4·3사건, 그리고 국군 14연대 남로당원 반란으로 시작된 여수·순천사건이 차례로 진압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고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돼 남로당은 불법 단체가 됐습니다.
북한에서도 정권이 수립돼 김일성 아래 부수상이 된 데다 자신이 떠나온 본거지 남한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어진 박헌영은 최후의 폭력 전술을 꺼내 듭니다. 바로 인민해방투쟁전술, 이른바 ‘4월 해방’입니다. ‘남로당 전 당원을 동원해 4월에 봉기해서 수류탄 1만 개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고 남조선을해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령은 결코 황당무계한 것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시당이 봉기하면 각 도당이 호응하고 산속에 있는 유격대, 즉 빨치산들과 연계해 남한 전 지역에서 폭동과 유격전을 전개한다, 그러면 때맞춰 북한의 인민군이 밀고 내려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2월 초부터는 실제로 수류탄 제조가 시작됐습니다. 아현, 일신, 협성, 동양흥업 등 선반 시설이 있는 공작소와 약방, 제약소를 동원해 염산과 유황으로 수류탄을 제조했습니다.
나중에 경찰에 압수된 완제품 수류탄이 무려 6000개에 달했습니다. 대도시이자 핵심 시설이 밀집한 서울을 초토화할 가장 파괴적이고 효과적인 게릴라전 무기가 수류탄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른바 ‘4월 해방’을 위해 김삼룡이 중앙당 군사위원회 총책을 맡고 시도당마다 군사부와 인민군사령관, 유격사령관이 임명됐습니다. 월북한 4·3사건 주역 김달삼의 부대 등 북한 유격대도 오대산, 일월산 등에 진출시켜 무장 폭동을 지원할 예정이었습니다.
‘4월 해방’의 성패는 남로당 조직의 80%를 차지하는 서울시당이 쥐고 있었습니다. 무장 봉기는 서울에서 시작해 서울에서 완성돼야 했습니다. 이 엄청난 책임을 맡은 것이 서울시당 부위원장 홍민표였습니다. 김삼룡은 홍민표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공작금 2천만 원을 주면서 ‘6만 당원을 동원해 수류탄 만 개로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박헌영의 지령을 전달했습니다. 홍민표는 당시 29세 인텔리 청년이었습니다. 1921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명문 경성 제2고보(경복고 전신)에 다닐 때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해방 후 경성사범대학(서울대 사범대 전신)에서 철학을 전공하다 지령을 받고 당에 복귀해 역량을 인정받았고 1949년 1월 서울시당 부위원장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홍민표는 해방 후 점차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해방한다고 배운 공산주의가 오히려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남로당이 인명을 대량 학살하는 데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국가보안법과 국군 숙군으로 남로당 조직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홍민표는 4월 해방은 불가능하다며 5월 해방으로 연기를 요구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남로당 군사부의 책임자 이중업이 체포되자 5월 해방은 다시 6월 해방으로 연기됩니다. 계획이 자꾸 연기되자 북한은 수백 명 규모의 유격대를 수차례 남파해 전방을 흔들며 지원에 나섭니다. 홍민표는 고뇌 속에서도 구체적 계획을 수립해 나갔습니다. 중앙청, 공공기관, 방송국에 대한 접수, 파괴 계획을 세웠고, 한강다리 폭파, 반동분자 숙청 명단 작성과 색출 계획, 비상사태에 대비한 보건 시설과 의료품, 의료진 확보 계획까지 수립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서울시의 행정을 접수하기 위해 12개 분과별로 시정 계획까지 마련했습니다. 폭동 후에는 어차피 은행 금고가 개방될 테니 전 당원은 넉 달 치 최저 생활비만 남기고 전 재산을 7월 말까지 당에 납부해 무기 제조 자금을 조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실제로 남로당원들이 집과 가구, 집기, 옷까지 팔아 7월 말까지 1천만 원의 거금이 조달됩니다.
이러는 사이 6월 해방이 7월 해방으로 또 연기됐습니다. 6월 29일 주한 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자 폭동의 적기라고 생각한 북한 정권은 자꾸 계획을 연기하는 홍민표에게 평양으로 오라는 소환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김삼룡의 만류로 일단 보류한 뒤 8월 20일에는 반드시 폭동을 일으키라고 재차 지시합니다. 계획이 더 이상 지연되지 않도록 평양에서 ‘오르그’(조직 책임자)가 특파돼 서울시당 홍민표를 비롯한 각 도당 책임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적을 달성하라고 다그칩니다. 각 시도당에는 ‘8월 20일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권을 접수하면 9월 1일 박헌영이 선거위원장으로 서울에 도착하고, 9월 20일 남조선 총선을 실시해 21일 서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 하달됩니다.
재촉에 쫓기던 홍민표는 7월 20일, 공장 세포의 2시간 파업과 가두 세포의 삐라 살포를 지시합니다. 일선의 조직과 투쟁 역량을 가늠해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홍민표는 ‘서울시당 간부와 당원들이 이미 각오를 상실했다, 조직 역량도 부족하다, 특히 노동자들이 혁명의 바탕이 될 적개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8월 20일 폭동 지시는 결국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9월 8일, 평양 지도부는 9월 20일에는 반드시 폭동을 일으키라고 최후 통첩을 보냅니다.
9월 16일 정오쯤, 대공 수사 당국이 주시하던 홍민표가 버젓이 서울 도심에 나타납니다. 남로당 거물이 백주 대낮에 을지로4가부터 무교동 아지트까지 대로를 활보하자 놀란 수사본부 요원들이 즉시 출동해 그를 체포했습니다. 이미 평양의 소환장을 받아든 홍민표는 북한으로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수하면 남로당 특수부대에 암살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홍민표의 선택은 체포되는 것이었습니다.
체포 후 오제도 검사의 심문을 받은 홍민표는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의사 결정의 자유를 조건으로 시경 회의실에서 남로당 서울시당 상임위원회를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9월 20일 홍민표는 최운하 형사와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서울시당 상임위원 16명 전원을 모았습니다. 홍민표는 두 시간에 걸쳐 이들을 설득했습니다. “지금까지 폭력 투쟁이 손실만 있었지 이득은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져 남로당은 이제 끝났다. 박헌영 개인을 위해 폭력 투쟁을 지시하는데 언제까지 복종하겠는가. 생명은 귀하고 한번 죽으면 두 번 살지 못한다.” 홍민표의 설득에 조병수 남로당 서울시 유격사령관을 비롯한 상임위원 전원이 눈물과 환호로 전향을 결의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뀔지도 몰랐던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이날, 9월 20일은 박헌영이 남한을 해방한 후 총선을 실시하겠다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어 홍민표 등 남로당 서울시당 간부들은 실명으로 동족상잔과 무장 폭동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언론에 발표합니다. 홍민표는 ‘남로당을 가장 잘 아는 내가 남로당을 뿌리 뽑는 데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경찰에 투신합니다. ‘한때의 동지를 붙잡아야 하는 인간적 고뇌는 있었지만 오제도, 정희택 검사 등이 동지애와 인간미로 위로하고 배려해줘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홍민표는 회고했습니다. 남로당 이너서클의 가장 가운데 있던 홍민표가 대공 수사에 합류한 뒤 그토록 끈질기게 쫓아도 잡히지 않던 남로당 총책 김삼룡, 이주하, 그리고 김일성이 직접 내려보낸 전설적 간첩 성시백이 줄줄이 체포됐습니다. 북로당 거물 정백은 홍민표의 설득으로 전향했습니다. 김일성에 대한 악감정을 갖고 있던 이주하는 전향해서 김일성과 싸울 뜻을 비추기도 했지만, 김삼룡은 홍민표와 대면하자마자 서로 눈물을 흘렸지만 ‘당신의 전향 후 이미 체포를 예감하고 있었다’며 전향에 대해서는 한마디 답도 하지 않았다고 홍민표는 회고했습니다.
홍민표 등의 집단 전향 후 정부는 10월 25일부터 30일까지를 남로당원 자수 기간으로 정하고, 다시 11월 30일까지로 연장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자수자가 33만명에 달했습니다. 해방 후 정국의 대세를 장악했던 남로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직을 확대한 결과, 어떤 식으로건 이들의 조직에 가입돼 있는 국민이 이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다음 해인 1950년 3월 1일 남로당 특별 공작원 196명이 체포되고, 3월 17일에는 김삼룡, 이주하까지 체포되면서 남로당 조직은 궤멸됐습니다. 공산당 조직은 수평적, 즉 횡으로는 약하고, 수직적, 종으로는 강하기 때문에 윗선 접선이 끊기면 조직은 붕괴됩니다. 김삼룡과 이주하 대신 남로당 총책이 된 박갑동은 서울, 대전, 팔공산, 그리고 이현상 부대, 경남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이 있는 지리산의 남로당원들을 연결해 규합하려 했지만 6·25 때 서울시 인민위원장으로 내려온 이승엽과의 알력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6·25 때 박헌영과 박갑동은 접선에 실패했고, 남로당원 중에는 인민군 남침 소식조차 몰랐던 자도 있었습니다. 홍민표가 전향할 때 상형문자 암호를 유일하게 해독할 줄 알았던 이태철까지 전향한 것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1949년 홍민표와 남로당원 33만명의 자수는 6·25전쟁 때 박헌영이 호언장담했던 남로당원 20만 명의 봉기를 미리 차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대한민국 전복의 위기가 지나간 것입니다.
홍민표는 이후 정계와 언론계, 재계에 몸담았고, 양한모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평신도 운동에 힘쓰다 1992년 별세했습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남은 생을 바쳤습니다. 일제의 압제 속에 많은 지식인, 청년이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믿고 공산당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주의의 비인간성과 폭력을 체험한 많은 이가 공산주의를 등지고 반공의 전선에 섰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차이가 개인의 운명을 갈랐고 체제의 운명도 갈랐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김정은 정권과 공산주의의 망령은 21세기 한반도를 떠돌며 자유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