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넉 달 뒤인 1948년 12월입니다. 정부 수립 저지를 위해 남로당이 일으킨 1948년 제주4·3사건과, 10월 14연대의 남로당원들의 반란으로 시작된 여수·순천 사건으로 정부 출범 두 달밖에 안 된 대한민국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 사건들로 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건을 일으키고 먼저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것은 남로당입니다. 이들은 점령하는 곳마다 북한의 인공기를 내걸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해방 직후부터 남로당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대구 10월 사건 등 수많은 불법, 폭력, 방화, 테러를 저질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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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군정은 그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했을 뿐, 남로당, 즉 공산당의 존재는 합법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박헌영은 미군정이 길러준 폭력의 우두머리’라는 비판까지 제기됐습니다.

그런데 정부 수립 뒤에도 남로당의 살인과 방화가 계속되고, 더구나 국가의 근간인 군이 국가에 맞서 총부리를 돌리는 사태마저 발생하자 이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으로 제정된 것이 국가보안법입니다. 10월 19일 시작된 여수·순천 사건이 전남 전역의 내전으로 번지던 10월 22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정부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거나 선동하는 분자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틀 뒤인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지하 공작으로 전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공산주의자들을 단호하게 숙청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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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결코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의 일방적 드라이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존립이 흔들린다는 국민적 위기감 속에 초당적으로 입법된 것입니다. 이미 정부 수립 한 달 뒤인 9월 20일 김인식 의원 등 33명이 제정 동의안을 제출해 국보법의 모체 격인 ‘내란행위 특별조치법안’의 기초 작업이 국회 법사위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자 국회는 법사위에 법안을 신속히 작성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법사위가 8차례의 토의, 그리고 법제처장과 법무장관 등을 초청한 가운데 개최한 간담회 결과를 종합해 국가보안법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이 법안이 제99차 본회의에 제출된 것이 11월 9일, 그러니까 여수순천사건 발생 후 불과 20일 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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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로부터 11일 뒤인 11월 20일, 국가보안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총 6개 조로 구성된 법안을 국회가 각 조문마다 토론한 뒤 표결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가장 논쟁이 치열했던 제1조도 81:12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습니다. 국보법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의원은 노일환, 김옥주, 박윤원 등입니다. 이들은 이 법이 남북 통일에 힘쓰는 애국지사를 탄압할 목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뒤 노일환, 김옥주, 박윤원은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였던 사실이 발각돼 15차례 공판 끝에 유죄 판결과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했습니다.

압도적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공포, 시행됐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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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제1조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수괴와 간부는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하고,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그리고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국헌은 헌법을 뜻합니다. 정부를 참칭하는 집단은 ‘정부가 아니면서 스스로 정부를 자처하는 것’으로, 결국 북한 정권과 북한을 추종하는 집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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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는 살인, 방화, 중요 시설 파괴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나 집단을 조직한 자에 대해 10년 이하의 징역,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내용입니다.

제3조는 지령을 받고 살인, 방화, 중요 시설 파괴의 실행을 협의, 선동, 선전하는 행위에 대해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내용입니다.

제4조는 이를 위해 총포, 탄약, 도검, 금품을 공급하거나 약속한 자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내용입니다.

제5조는 자수자에 대한 형의 경감, 면제를 담고 있고, 제6조는 타인을 모함하기 위해 이 법의 규정한 범죄에 대해 허위 고발, 위증, 날조한 자에 대한 처벌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보법은 결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강도 높은 법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담은 법이었습니다. 국보법 시행 첫 1년 동안 이 법으로 검거, 입건된 사람이 11만8621명이었고, 132개 정당, 사회단체가 해산됐습니다. 전국 18개 형무소와 1개 지소가 좌익 수감자로 가득 차 형무소 2개를 새로 지어야 했습니다. 좌파들은 이것이 인권 탄압의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도외시한 주장입니다. 해방 직후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던 남로당이 민청, 민애청, 전평 등 수많은 외곽 단체를 통해 무차별로 조직을 확대했던 당시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국보법의 최우선 적용 대상은 군이었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 후 광주 4연대, 마산 15연대, 대구 6연대에서 잇따라 남로당계의 반란이 일어나 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군이 남로당의 온상이 됐던 것은 폭력 혁명을 위해 가장 먼저 장악해야 할 곳이 군이었기 때문이고,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지른 남로당원들이 신원 검증 없이 입대해 은신처로 삼을 수 있는 곳도 군(정부 수립 이전 국방경비대)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보법 시행 후 1949년 7월까지 무려 4794명의 장병이 사형, 유기징역, 불명예제대 등으로 숙군됐습니다. 5568명은 탈영해 버렸습니다. 육군 총병력의 10%, 1개 사단 인원이 공산당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국보법이 없었다면 이들은 1년 반 뒤 일어난 6·25전쟁 때 총을 거꾸로 들었을 것이고, 미군이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은 끝나 한반도는 공산화됐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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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내 남로당계의 수뇌부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인 최남근·김종석, 조병건·오일균 등이었지만 육사 1·2·3기 출신 장교들도 다수 적발됐습니다. 특히 육사 3기는 임관자 281명 중 무려 60여 명이 숙군됐습니다. 여수·순천 사건 주동자 김지회·홍순석, 군산12연대 반란 음모자 김응록, 나주 주둔 부대 반란 주모자 김남근이 모두 육사 3기였습니다. 이들이 육사에 다닐 때 생도대장이었던 오일균·조병건·김학림·김종석 등이 이들에게 사상 교육을 시켜 포섭했기 때문입니다.

1949년 2월 13일 서울고등군법회의는 중령 최남근·김종석, 소령 조병건·오일균·박정희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우리 군에 중령은 몇 명뿐이고 소령이면 매우 높은 계급이던 때였습니다. 김종석은 8월 2일 처형 직전 웃으며 인민공화국의 적기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남로당 군사부장 박정희는 남로당원 200명의 명단을 넘긴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이승만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습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몸담기는 했지만 군 내부에서 다른 구성원들을 포섭하는 공작을 직접 실행한 적이 없었음이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과 방첩과장 김안일 등의 조사로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백선엽과 김안일은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월북해 버린 자들도 있었습니다. 춘천에 주둔하던 8연대 1대대장 소령 표무원과 홍천에 주둔하던 8연대 2대대장 소령 강태무는 1949년 5월 4일과 5일, 휘하 장병들까지 속여 38선 이북으로 끌고 올라갔습니다. 장병 다수는 속은 걸 알고 목숨을 걸고 싸워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150여 명은 교전하다 전사했고, 일부는 투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표무원과 강태무는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 남침했고, 강태무는 소장까지 승진한 뒤 2006년 사망했고, 표무원은 2007년 사망했습니다. 1949년 5월 10일에는 해군 제2특무정대 508명이 포항 해상에 도착했을 때 남로당 장병들이 일반 사병을 내무반에 감금하고 사령관과 정장을 사살한 뒤 월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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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존속되고 있습니다. 1991년 개정된 국보법은 ‘반국가단체’ 개념에 대해 ‘지휘 통솔체계를 갖춘 단체’로 범위를 선명하게 한정했습니다. 또 금품수수, 잠입과 탈출, 찬양과 고무, 회합과 통신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의 존립과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행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국보법 폐지 세력이 독소조항이라고 지목하는 ‘불고지죄’는 이승만 정부 때가 아닌 4·19 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 때 추가된 내용입니다.

현행 국보법은 국가 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규정만 담고 있습니다. 국보법 제1조 2항에는 ’이 법을 해석 적용함에 있어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고,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이례적으로 명시하기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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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이 법이 남북 교류를 막는다고 주장하지만, 1970년대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수많은 남북 교류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됐습니다. 또 이 법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37조는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고, 실제로 무력 도발과 사이버 공격을 멈춘 적 없는 북한 정권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국가 전복 음모와 선동은 물론이고 국방 비밀 누설, 한국 방송 청취, 유인물 보관까지도 ‘반국가 및 반민족 범죄’로 정해 최고 사형에 처하는 가혹한 형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공소시효 적용조차 배제합니다.

좌파 세력은 북한의 형법과 노동당 규약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않으면서, 이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인 국보법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때도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문재인 정부 국정원도 국보법 폐지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좋아지는 것은 오직 간첩뿐이고, 이로 이득을 보는 것은 김정은 정권뿐일 텐데도 국보법 폐지 요구는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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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국보법이 폐지되면 어떤 일이 가능해질까요?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공산당을 창당할 수 있습니다. 주체사상 책자를 만들고 강의도 할 수 있습니다. 북한과 교신할 수도 있고, 광화문에서 인공기를 흔들거나 집에 게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행위들에 대한 처벌이 오직 국가보안법에만 규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형법상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간첩죄는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나 군사기밀을 누설했을 때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법적 장치입니다.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국제 사회에서, 더구나 끊임없이 우리 사회 내부를 허무는 공작을 벌이는 북한 정권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울타리를 허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