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이 칠레를 방문했을 때 동포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자유당 시대를 완전히 독재 시대·암흑 시대·어두컴컴한 시대로 생각했었는데 그때 토지 개혁·농지 분배를 했고, 지나고 보니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었다. 그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도 국가 독립, 안정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체제를 지켜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 개혁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획기적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진보 진영 대통령이 평가한 것입니다. 이승만의 토지 개혁이 왜 대한민국을 지켰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토지 개혁은 사전적으로 ‘토지에 관한 제도나 규정을 완전히 바꾸거나 새로 만드는 것’, 쉽게 말하면 땅 주인들에게 땅을 유·무상으로 몰수해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나라가 식민 통치에서 독립하거나, 공산 혁명으로 지주의 땅을 빼앗는 것 같은 혁명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이 장악한 북한에서는 해방 7개월 만인 1946년 3월 토지 개혁이 실시됐습니다. 좌파는 미국과 이승만이 분단을 획책했다고 비난하지만, 북한은 해방되자마자 제멋대로 자신들만의 토지 개혁을 해버린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통일은 처음부터 ‘공산화 통일’뿐이었던 것이죠. 북한 지역의 사실상의 정부였던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토지 개혁 법령을 발표하고 불과 20여 일 만에 집행을 완료했습니다.
그들의 토지 개혁은 공산당식 ‘무상 몰수, 무상 분배’ 즉 돈 한 푼 안 주고 땅을 강제로 빼앗아 국유화한 것입니다. 농민들은 갑자기 땅을 나눠주니 환호했지만 알고 보면 그 땅은 자기 땅이 아니라 공산당의 땅이었습니다. 땅을 팔거나 담보로 잡힐 수도 없었고, 농사지은 것도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확의 4분의 1을 현물세라는 명목으로 거둬갔습니다. 애국미 등 이것 떼고 저것 떼고 나면 실제 세율은 30%, 최고 40%에 달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김일성은 남한의 점령 지역에서도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그때 이 ‘현물세’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현물세 징수를 위해 예상 수확량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제일 잘 익은 곡식의 낱알만 헤아려서 농민들이 “왜놈들도 이러지는 않았다”며 반발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6.25전쟁 후에 우리 정부가 국가 재건을 위해 임시 토지수득세, 강제양곡매상, 농지 상환금 등으로 부득이하게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거둬갔을 때에도 농민들은 “인공(북한) 치하보다는 낫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은 언제 실시됐을까요.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1년 반 넘게 입법을 위한 진통이 계속됐습니다. 마침내 농지개혁법이 최종 공포된 것은 1950년 3월 10일, 6.25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석 달 전입니다. 정말 아슬아슬했던 역사의 명장면입니다. 토지 개혁 전에 전쟁이 일어났다면 지금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시행 속도입니다. 농지개혁법 공포 불과 보름 뒤인 3월 25일에는 시행령, 한 달 뒤인 4월 28일에는 시행규칙까지 공포됐습니다. 그 결과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인 5월까지 전국 농지의 70~80%가 농민들에게 분배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군사작전처럼 빠르고 효율적인 토지 개혁 실시가 가능했을까. 여기에는 ‘공산당을 막으려면 농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며 해방 직후부터 토지 개혁을 강조해 온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됐지만 법안의 모순점이 발견되면서 곧바로 다시 수정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최종 입법을 기다리지 않고 농촌 실태 조사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조사가 연말에 완료돼 정부가 사들일 농지의 면적이 확정됐습니다.
이어 사들일 농지의 지번, 지목, 지적, 등급, 임대 가격, 주 재배물, 지주, 경작자까지 조사해 기재한 ‘농지 소표’가 작성됐습니다. 그 결과, 수정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최종 공포된 1950년 3월 10일에는 농가별로 어느 땅을 어떻게 분배할지 알려주는 ‘농가별 분배 농지 일람표’ 작성까지 모두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 일람표가 3월 15일부터 24일까지 모든 농민에게 배부됐으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3월 24일 전에 모두가 내 땅 문서를 받아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봄 농지에 씨를 뿌리기 전까지 토지 개혁을 완료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새해 춘경기(씨 뿌리는 때) 전에 토지 개혁을 완수하라는 특별 교시를 내렸고, 1950년 1월 17일에는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토지 개혁을 위한 추가 예산안을 우선 상정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윤영선 당시 농림부 장관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었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 단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씨 뿌리는 시기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해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단행하라는 이대통령의 강력한 독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1950년 4월 15일 토지개혁이 마무리됐고 농지의 70~80%가 성공적으로 분배됐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자기 땅을 농사짓는 자작농은 전체의 13%에 불과했습니다. 수백 년 소작을 했던 농민들이 마침내 지켜야 할 내 땅을 갖게 됐고, 대한민국은 ‘내가 지켜야 할 나라’가 된 것입니다. 6·25 남침 후 땅을 나눠주겠다는 북한 공산당의 선동은 그래서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토지개혁 방식은 ‘유상 매수, 유상 분배’였습니다. 9천 평 이상의 농지를 가진 땅 주인들에게 국가가 땅을 사들이고, 농민들이 값을 치르고 그 땅을 분배받는 형식이었습니다. 땅 주인들에게는 연 평균 수확물의 1.5배 가치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지급했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5년에 걸쳐서 그 대금을 상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땅값이 시세에 못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땅 주인들은 반발했지만, 농민들은 1년 수확의 30%씩을 5년만 납부하면 완전한 자기 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훗날 국내외에서 많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좌파들에게서조차 말입니다. 남미 좌파의 대부인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2004년 한국 방문 때 “한국은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브라질은 대지주 1.6%가 전체 농지의 53%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 노동운동가인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은 2천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고,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이었다. 40%라는 엄청난 고율의 세금을 거둬가고, 그나마도 1957년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다시 빼앗아간 북한의 농지개혁과는 비교대상도 될 수 없다.”고 2017년 말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한국의 발전 이유로 토지개혁과 교육 평등주의를 꼽았습니다.
농업국가였던 1950년의 대한민국에서 농민에게 땅은 자신과 가족들의 존재기반이었습니다. 존재기반이 생긴 농민들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주체가 됐습니다. 산업화된 21세기 대한민국에서의 땅은 ‘집’일 것입니다. 집은 의식주의 기본 욕구이자 가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가정의 존재기반입니다. 대한민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집값도 상승했고, 이를 통해 가계의 부가 축적되고, 국부도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투기를 때려잡는다며 내 집 마련의 당연한 욕구를 봉쇄하고, 좋은 집을 사서 살고 싶어하는 국민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은 가정의 존재 기반,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뤄온 경제성장의 원리와 시장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1948년 12월 4일 라디오 연설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 개혁에 대해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복리를 누려야 하는데, 몇몇 사람이 주인이 돼서 복리를 독점하며 부자는 대대로 부자요 양반은 대대로 양반으로 지냈으니, 이와 같이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평등, 자유로 복리를 다 같이 누리는 것이므로 토지개혁법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은 당연히 여기고, 집 없는 서민과 미래 세대가 집을 소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책은 대한민국 건국 정신과 헌법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국민에게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나라가 지켜지고 경제는 발전합니다. 이것이 1950년 토지 개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