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2시 45분쯤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의 광주극장 E열 객석으로 한 남성이 들어섰다. 오후 3시 상영작인 ‘바톤 핑크’를 보러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던 그를 보고 한 관객이 소리쳤다. “봉준호다!” 곧이어 여기저기 관객들이 사인해 달라며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2층 객석의 한 관객은 사인 용지를 끈에 매달아 봉 감독의 객석 근처로 늘어뜨렸다. 봉 감독은 10여 분 내내 미소를 띠고 일일이 사인에 응했다.
이날 ‘바톤 핑크’ 상영은 봉 감독의 추천으로 진행됐다. 1935년 개관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850석)인 광주극장이 16일까지 여는 ‘개관 90주년 광주극장 영화제’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이날 관객 대화 시간은 지난달 티켓 오픈 직후 전석 매진됐다. 광주극장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깐느극장으로 등장한 곳이다. 지난 6월에는 고향사랑 기부금으로 들어온 2억1000만원으로 영사기와 스크린을 교체하는 등 100주년을 위해 새 단장도 했다. 광주극장 운영을 맡고 있는 김형수 전무는 봉 감독 등장으로 시끌벅적해진 상영관을 보며 “오늘이 광주극장 개관 이래 가장 가득한 날인 것 같다”며 “봉 감독께서 흔쾌히 와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영화 상영 직후 무대에 올라선 봉 감독은 850석을 메운 관객들을 보며 연신 “어이구야” 탄성을 질렀다. 그는 “혼자 영화 공부하던 무렵인 1991년 ‘바톤 핑크’를 신촌 ‘영타운문예극장’의 작은 스크린으로 관람했다”고 운을 뗐다. ‘바톤 핑크’는 코엔 형제의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봉 감독은 “이 영화처럼 계속 새로운 관객이 생기는 게 세월을 이겨내는 영화의 매력”이라며 “그런 만남이 가능하게 해주는 이런 공간이 매우 소중하다”고 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주인공인 ‘바톤 핑크’는 봉 감독에게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게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을 보니 25년 전 데뷔작을 찍을 때가 생각난다”며 “혹시 ‘플란다스의 개’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계속 보지 않으실 것을 권유한다”고 말해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그는 “제게도 벌이가 시원찮아 아이 기저귀 값도 못 벌던 시절이 있었다”며 데뷔작 집필 당시의 뒷얘기를 털어놨다. 20대에 결혼해 아내와 아이가 있었으나 장편 데뷔를 못 하던 그는 제작사가 마련해준 강원도 속초의 외딴 오피스텔에 기거하게 됐다. “젊은 감독들은 서울에 있으면 술 마시고 집중을 못 한다”는 이유였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아는 이 한 명 없던 속초에서 파도 소리만 벗하던 그는 고립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봉 감독은 “급기야 2주 지나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며 “써야 할 시나리오는 써지지 않고, 컴퓨터 화면에는 ‘나한테 상처 준 사람’ 리스트와 ‘내가 상처 준 사람’ 리스트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순위까지 바꿔가며 리스트를 작성하던 그는 결국 한 글자도 못 쓰고 서울로 돌아왔다.
결국 제작사에 “한 달만 더 달라”고 부탁해 동네 커피숍에서 미친 듯 쓰기 시작, 어렵게 완성한 시나리오가 ‘플란다스의 개’였다. 봉 감독은 “그때 저의 쓰기 습관이 확립됐다”며 “저는 절대 고립된 곳에서 쓰면 안 되고, 일상 생활하며 커피숍에서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저는 작가로서 정체성이 더 크다”며 “직업란에 감독보다 작가라고 먼저 쓴다”고 했다. 그는 연출작 8편의 시나리오를 모두 직접 썼다. “가장 빨리 쓴 시나리오는 ‘기생충’으로 5개월, 가장 오래 쓴 시나리오는 ‘살인의 추억’으로 13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글쓰기의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관객 질문에 “인간도 동물이다 보니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다가 동물 하는 짓을 보며 영감을 얻는다”며 영화 ‘괴물’을 예로 들었다. “괴물이 인간을 하수구로 운반하는 플롯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펠리컨이 물고기 운반하는 장면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봉 감독은 “글쓰기 영감은 도처에 널려 있다”며 “여기 충장로를 걷다가 엄청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으니 오감을 열어 놓고 촉수를 곤두세우는 게 작가들에게는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필수적이지 않은 장면이 깊은 잔상을 남기는 뜻밖의 감동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에서 주인공이 부친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얼음 아래 잠자리를 내려다보는 장면을 예로 들었다. “주인공이 ‘아빠가 죽었다’고 한마디만 하는데, 그 말을 영원히 썩지 않을 것처럼, 얼어붙은 잠자리로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 놀랍다”며 “그런 감각은 훈련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질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촬영할 때 가장 힘들었던 영화로는 ‘살인의 추억’을 들었다. 봉 감독은 “유일하게 음주 상태에서 찍은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라며 “너무 어린 여학생들이 피해자라서 심정적으로 힘들어 소주 반 병을 마시고서야 찍을 수 있었다”고 했다. ‘살인의 추억’은 실제 사건을 다루는 봉 감독의 원칙에 따라 직접적인 폭력 묘사는 없이 벌어질 폭력에 대한 무서운 느낌만 살렸다.
이제껏 들어본 평론 중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은 “이 영화의 장르는 봉준호”라는 한 미국 기자의 평이었다고 했다. “‘기생충’ 개봉 때 미국 기자가 ‘그냥 장르 자체가 봉준호라는 장르’라고 했는데, 장르를 규정하지 않고 쓰는 제 스타일을 잘 반영한 표현이라 마음에 들었다”며 “영화의 장르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일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