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22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정문 앞에서 광부와 마을 주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광부들의 임금 인상과 노조 직선제 요구로 시작된 당시 시위는 24일 오전 극적으로 종료됐으나, 이후 경찰이 시위 가담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다./엣나인필름

1980년 4월 22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광부들은 마을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안경다리 위로 모였다. 하루 전 이들이 일으킨 농성을 진압하러 경찰이 몰려오고 있었다. 광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리 아래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맞섰다. 하지만 맞바람이 불면서 오히려 자충수가 됐다. 눈조차 제대로 못 뜨던 경찰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멩이에 속수무책이었다. 돌에 맞아 순경 1명이 숨지고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른바 ‘사북 사건’으로 불리는 유혈 사태가 낳은 참상이었다.

당시 사흘간 이어진 ‘사북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이 지난달 29일 개봉했다. ‘1980 사북’은 최근 늘어난 정치·사회 다큐 중에서도 가장 균형 잡힌 시각과 철저한 취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장편 대상 등을 받았다. 다큐를 연출한 박봉남(59) 감독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얽힌 사건에서 나의 잘못은 없는가, 투쟁은 항상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1980년 4월 22일 강원도 정선 사북광업소로 통하는 안경다리 위에서 광부들이 다리 아래로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이날 사태로 경찰 1명이 숨지고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엣나인필름

박 감독이 사북의 진실을 파고들게 된 것은 2019년 한 통의 전화가 계기였다. 서울대 국사학과 85학번인 박 감독에게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 1년 선배이던 황인욱씨가 도움을 요청했다. 사북 출신인 황씨는 “사북 항쟁 40주년이 다가오니 자료 조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박 감독은 “사북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항쟁이라는 단어가 생경했다”며 “입장에 따라 항쟁, 사건, 폭동으로 달리 불리는 사건의 실체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박 감독은 입수 가능한 모든 자료를 뒤졌다. 사진, 영상, 음성, 문서의 원본만 모아 배경과 전개 과정, 노조와 공권력 양측의 주장과 진실 공방을 추적했다. 당시 노조 시위는 공수부대 투입을 불과 몇 시간 앞둔 4월 24일 오전 4시 극적으로 종료됐다. 곧이어 가담자 색출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보안사·경찰·헌병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단이 주민 200여 명을 끌고 갔다. 다큐에서 주민들은 “모진 고문과 폭력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한 주민은 “경찰이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꿇어앉히더니 고춧가루를 물에 타 코에 들이부었다”고 했다. 경찰이 “너희는 죽어서 나가야 한다”며 군홧발로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짓이기듯 걷어차는 등 성적인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박 감독은 특히 경찰과 시위대 양측 모두에 의해 발생한 억울한 피해자들에 주목했다. 노조 지부장 이재기씨의 아내 김순이씨는 조합원들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조합원들이 잠적한 지부장 이씨 대신 아무런 죄가 없는 김씨를 끌어내 이틀간 기둥에 묶고 집단 폭행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동명이인을 엉뚱하게 끌고 가 문초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 주민은 고문 후유증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등지고 스님이 되기도 했다.

디테일로 들어갈수록 또 다른 진실이 드러났다. 안경다리 투입 경찰 중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진문규 순경은 다큐에서 “저를 구해준 사람은 광부였다”고 증언했다. 노조비 1700만원을 착복한 것으로 알려졌던 이 지부장은 사무장이 횡령한 9800원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진 것으로 확인됐다. 조합원들에게 모진 일을 당하고, 떠밀리듯 고향을 떠나 홀로 행상을 하며 네 아이를 키운 지부장 아내 김씨는 구순을 앞둔 지금도 4월만 되면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무기고 파손 혐의로 실형을 살았던 광부 강윤호씨는 2022년 재심에서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을 듣고 울먹이는 강씨의 모습도 다큐에 담겼다. 강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강씨를 포함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출연자 중 10여 명이 그새 고인이 됐다. 박 감독은 “이 작품이 어두웠던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상처를 서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