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한국 극장가를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점령했다. ‘주술회전’ ‘체인소 맨’ ‘귀멸의 칼날’ 등 확실한 만족을 보장하는 영화에 관객이 몰린다. 세 작품은 흔히 ‘도파민이 터진다’고 표현하는 짜릿한 재미를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이후 변화한 국내 관객들의 영화 선택 패턴도 보여준다.
극장판 일 애니의 흥행 행진은 지난 8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하 ‘귀칼’)에서 시작돼 가장 최근 개봉한 ‘극장판 주술회전: 회옥·옥절’(이하 ‘주술회전’)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극장판 주술회전: 회옥·옥절’은 개봉 당일인 지난 16일 바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지난 9월 개봉한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체인소 맨’)은 2~4위를 오가다 개봉 3주 차인 지난 11일에 1위로 뛰어올랐다. 개봉 3주 차 영화의 1위 등극은 매우 이례적이다. ‘체인소 맨’은 16일 하루 ‘주술회전’에 1위를 내줬으나 17일에 누적 관객 200만명을 넘어서며 1위를 탈환했다. 누적 매출 역시 215억원을 돌파하며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2021)의 매출(213억원)도 넘어섰다. ‘귀칼’은 개봉 석 달째에도 5~6위를 유지하며 관객 545만명을 넘겼다. 일본 애니로는 역대 최대 흥행작인 ‘스즈메의 문단속’(558만명)을 제칠 기세다.
이 세 편의 총 관객은 10위권 영화 전체 관객의 절반이 넘는다. 18일의 경우, 세 작품의 관객은 17만5638명으로, 10위권 내 영화 총 관객(31만6142명)의 56%다. 극장판 일 애니의 성공은 코로나 이후 관객 패턴을 반영한다. 극장이 영화를 관람할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되면서, 관객들은 극장 나들이를 위해 ‘안전한’ 작품, 즉 재미가 보장된 영화를 선호하게 됐다. 화려하고 강렬한 액션, TV판에서 검증된 재미를 주는 ‘주술회전’ ‘체인소맨’ ‘귀칼’이 선택받는 이유다. 영화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지난 18일 미장셴단편영화제 관객 토크에서 “요즘 시대는 도파민이 필요한 것 같다”며 “저도 아들과 놀이공원에 가면 회전목마와 후룸라이드를 골고루 타지 않고 청룡열차만 3번 탄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관객은 기회 비용을 치를 만하다고 여겨야 극장을 찾는다”며 “한국 영화도 롤러코스터 타듯 확실한 재미를 주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코로나 이전에 비해 장기 상영이 가능해진 점도 변수다. 이는 골수 팬층이 탄탄한 일 애니의 입소문 영향력을 강하게 한다. 코로나 이전 영화의 흥행 여부는 1~2주 만에 결정됐다. 개봉 첫 주 성적이 부진하면 곧바로 상영관이 줄어들며 극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 관객들은 개봉 첫 주에 움직이기보다 ‘진짜 재밌다’는 후기를 듣고서야 극장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따라서 개봉 2~3주 차에도 흥행이 가능하다. 극장 측도 꾸준히 관객이 드는 영화에는 상영관을 지속적으로 배정한다. ‘체인소 맨’이 개봉 3주 차 1위라는 이례적인 성적이 가능했던 것도 장기 상영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한국 영화가 부진하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다. 추석 연휴 유일한 대작 상업 영화였던 ‘보스’는 ‘체인소 맨’에 1위를 내주고는 누적 222만명에 그치며 2~3위를 오가고 있다. 지난해 추석 대표작이었던 ‘베테랑2’의 752만명에 비해서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연말에는 ‘극장판 주술회전: 시부야사변Ⅹ사멸회유’도 개봉 예정으로, 일 애니의 인기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형호 영화시장 분석가는 “최근 영화 시장에서는 극장판 애니처럼 타깃층이 명확한 영화가 성공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 영화도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게 나온다면 관객들이 얼마든지 찾아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