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조지 모리슨(왼쪽)과 아들 이언 모리슨.

내 고향은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바다 옆으로 울산 쪽으로 가는 길로 차로 약 1시간 정도 달리면 닿는 양남면 나산이라는 곳이다. 김녕(金寧) 김(金)씨 집성촌(集姓村)이다.

어렸을 때부터 산에 오르면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초등학교가 바로 바다 옆에 있어서 어릴 때 여름에는 자주 해수욕을 다녔고, 태풍이 오면 거센 파도 구경을 가기도 했던 추억이 새롭다. 이곳이 커다란 궤짝에 담겨 온 석탈해(昔脫解)가 발견됐다는 전설이 서린 아진포(阿珍浦)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대보름날이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달맞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산꼭대기에서는 일망무제(一望無際)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공부를 많이 하신 동네 아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어렸을 적에 저 바다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는데, 아마 저 바닷속에 당시 침몰한 군함들이 그대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 후 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하면서 그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에 시작하여 1905년 6월에 끝났으니, 동네 노인들의 유년 시절과 일치했다.

울산해전

그 전투는 일본과 러시아 군함들이 격돌했던 1904년 8월의 울산해전이었을 것이다. 그해 8월 14일, 울산 남방 해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일본 제2함대와 교전했다. 러시아 해군은 장갑순양함 ‘류리크’를 잃고, ‘로시야’와 ‘그로모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후퇴했다. 뤼순(旅順)해전과 황해해전으로 서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이미 장악한 일본 해군은 이 울산해전으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 이듬해 5월 쓰시마해전 승리의 토대를 마련했다.

나는 그 전쟁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고향의 동해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전함들끼리 격렬하게 싸우는 광경과 바닷속 깊이 침몰한 군함을 상상하곤 했다. 오래전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장편 《언덕 위의 구름》을 읽으며 러일전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발틱 함대의 전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러시아 역사학자 콘스탄틴 플레샤코프가 쓴 《차르의 마지막 함대》를 시작으로 국내 자료는 물론 해외 번역 서적,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에서 발간된 책들도 꾸준하게 읽어 왔다.

조선의 국권(國權)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러일전쟁을 무대로 한 책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위로는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과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도고 헤이하치로(東鄉平八郞),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등 양국의 군인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있다. 러일전쟁을 취재했던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 특파원 조지 어니스트 모리슨 부자(父子)다.

러일전쟁의 산 증인

필자는 요코테 신지(橫手愼二)가 2005년 중앙공론신사(中央公論新社)에서 중공신서(中公新書) 시리즈로 발간한 《일로전쟁사(日露戰爭史): 20세기 최초의 대국 간 전쟁》을 통해 조지 E.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1862~1920년)에 대해 알게 됐다.

호주 출신인 모리슨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의 베이징(北京) 특파원으로 특종을 많이 했다. 1898년 3월 러시아의 뤼순항(포트 아서) 임차 요구 최후통첩, 그리고 1900년 의화단 사건의 참혹한 현장 장면 보도로 유명하다. 특히 1901년 1월 러시아와 청(淸)나라 간의 철도 관련 협정을 폭로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영국 특파원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러일전쟁은 그의 특종들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러일전쟁 중 모리슨은 일본군을 따라 포트 아서 함락(1905년 1월)을 목도하고, 그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평화협상을 취재했다. 러일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 있었던 그는 한마디로 말해 ‘러일전쟁의 산 증인’이다.

모리슨은 전쟁 초기에는 일본을 지지하며 러시아의 만주 팽창을 비판했지만, 전쟁 후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태도가 영국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입장을 바꿨다. 그는 일본의 만주 및 한국 지배가 중국과 영국의 이해관계에 반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시각을 담은 《더 타임스》 보도들은 국제적 논쟁을 촉발하기도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정치고문으로 할약

조지 모리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은 위안스카이(세 번째)의 정치고문으로도 활동했다.

모리슨은 러일전쟁 이후에도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더 타임스》에 중국의 정치·사회·외교 상황을 보도했다. 1907년에는 베이징에서 베트남 통킹까지, 1910년에는 중국 중부에서 러시아 투르키스탄까지 여행하며 중국 내 각 지역의 실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광범위한 인맥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정치적 변화와 외세의 영향을 분석했다. 그의 보도는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외국 열강의 개입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모리슨은 1912년 《더 타임스》 기자를 사임하고 중화민국 초대(初代) 총통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모리슨은 중국의 공화정 체제를 지지하며, 중국이 세계 외교 무대에서 주권을 유지하도록 도우려고 애를 썼다. 특히 일본의 팽창주의와 ‘21개조 요구’(1915년)에 반대하며 중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1919년, 그는 중화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참석해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이 시기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결국 1920년 영국에서 만성 췌장염으로 사망했다.

모리슨의 이러한 행적은 영국 정보국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랍 민중들의 봉기를 촉구하고 그들을 도우려 했던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즉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흡사하다. 그래서 모리슨은 ‘베이징의 모리슨’이라고 불렸다. 영문 자료들에는 그를 조지 어니스트 ‘차이니스’ 모리슨(George Ernest ‘Chinese’ Morrison)이라고 표기한 것을 곧잘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그가 얼마나 중국과 깊이 엮여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아시아 도서관’ 모리슨 컬렉션

동양문고 설립자 이와사키 히사야.

베이징에 있는 모리슨의 집은 중국 관련 도서와 자료로 가득한 ‘아시아 도서관(Asiatic Library)’으로 유명했으며, 동서양 학자들과 여행자들의 방문지로 각광받았다. 모리슨은 1897년부터 1917년까지 약 1만 2000파운드(2022년 기준 약 160만 달러)를 투자해 중국 및 아시아 관련 도서, 지도, 원고, 팸플릿 등 약 2만 4000점의 자료를 수집했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중국 관련 개인 컬렉션으로 평가받았다.

1917년, 건강 악화와 재정난으로 고생하던 모리슨은 이 컬렉션을 일본 미쓰비시재벌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아들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에게 3만5000파운드(약 380만 달러)에 매각했다. 단, 컬렉션이 분해되지 않고, 진지한 학자들에게 접근이 허용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와사키 히사야는 1924년 모리슨의 컬렉션과 자신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일본 도쿄에 동양문고(東洋文庫·Oriental Library)를 설립했다. 모리슨 컬렉션은 동양문고의 핵심 기반이 되었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연구의 주요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에는 모리슨의 둘째 아들 앨리스터 모리슨의 동남아시아 관련 자료도 동양문고에 추가로 기증되면서 컬렉션이 확장되었다. 2017년에는 동양문고가 모리슨 컬렉션 도착 100주년을 기념해 전시와 강연을 개최하며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동양문고는 모리슨 컬렉션을 기반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과 동아시아 역사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한국의 관련 연구자들도 이 도서관을 많이 찾고 있다.

모리슨의 자료는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외교·문화 연구에 필수적인 1차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도 동양문고는 디지털화와 전시를 통해 모리슨의 유산을 보존하고 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호주의 중국인 커뮤니티도 모리슨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캔버라에서 매년 강연을 개최하고 있다. 이는 그의 중국 연구와 호주-중국 관계 증진에 대한 기여를 기념하는 행사로 현재도 호주국립대학교(ANU)에서 이어지고 있다. 모리슨의 일기·편지·사진 등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도서관(State Library of NSW)의 모리슨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의 생애와 중국 내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모리슨의 업적은 호주에서 친중(親中) 활동의 좋은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아들 이언, 낙동강 전선 취재하다 순직

한국전쟁을 취재하러 온 동료 종군기자들과 함께한 이언 모리슨(뒷줄 원 안).

조지 E. 모리슨은 1912년 뉴질랜드 출신의 제니 워크 로빈과 결혼해 세 아들(이언, 앨리스터, 콜린)을 두었다. 여기서는 첫째 아들 이언 어니스트 맥레비 모리슨(Ian Earnest McLeavy Morrison·1913~1950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태평양 전선에서 아버지가 일했던 《더 타임스》의 전쟁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싱가포르 전투를 비롯하여 뉴기니와 부나-고나 전투 현장을 취재하면서 여러 차례 위험에 처했다. 1943년에는 비행기 사고로 척추 및 두부 손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다시 취재 일선으로 복귀해 유럽·아시아 각지를 누볐다. 이후에도 총상을 입었지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더 타임스》는 그를 한국 종군기자로 특파했다. 그는 7월 10일 전선에서 첫 기사를 송고(送稿)하여 낙동강 전선의 참상을 생생히 전했다.

8월 12일 이언은 대구 부근 왜관에서 노획한 북한 탱크를 관찰하기 위해 현장으로 향하던 중, 그가 탄 지프차가 지뢰를 밟아 폭발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인도 대령 M. K. 우니 나야르, 영국 기자 크리스토퍼 버클리도 함께 사망했다.

이언은 대구의 한 사설 선교사 묘지에 버클리와 함께 묻혔다. 동료 기자들이 그의 관(棺)을 운구했고, 미군 의장대가 조총(弔銃)을 발사하고, 영국군 행사곡인 ‘라스트 포스트(Last Post)’가 연주됐다. 안타깝게도 그의 묘지는 종교계 관련 공동묘지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모리슨 등 3명이 사고로 사망한 얘기는 백선엽(白善燁) 장군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후일 국방장관을 지낸 최영희(崔榮喜) 장군도 “그들에게 위험한 장소이니 가지 말라고 극구 만류했지만 현장으로 간 그들의 취재 정신에 감동했다”고 회고했다.

6·25전쟁을 취재한 외국 종군기자로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 영국 BBC의 앨리그잰더 워커, 《뉴욕 트리뷴》의 호머 비글로, 《라이프(LIFE)》지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이언 모리슨 등 18명이 순직(殉職)했다.

이언의 연인 한쑤인

소설가 한쑤인. 사진=영국국립초상화박물관

중국계 소설가이자 의사인 한쑤인(韓素音·1916~2012년)은 1916년 9월 중국 허난(河南)성 신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저우광후(周光瑚). 아버지는 중국인 철도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벨기에 태생 여성이었다. 그녀는 193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38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당군 장교 탕파오황과 결혼했다. 한쑤인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는데, 첫 소설은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의 미국 선교병원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한 《충칭(重慶)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쑤인은 1944년 런던에 가서 의학을 더 공부했다. 1947년 남편 탕파오황은 만주 전선에서 중국 공산당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한쑤인은 1949년 홍콩으로 가서 퀸메리 병원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이언 모리슨을 알게 되어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사라는 싱가포르 여성과 결혼했으나 별거 중이었던 이언은 한쑤인과 사귀면서 이혼을 하려 했지만,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쑤인과 법적 결혼 관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쑤인은 1952년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인 장교 콤버와 재혼하고 싱가포르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싱가포르의 명문 난양공대를 세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1958년 콤버와 이혼하고 다시 인도인과 결혼하여 살다가 2012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스트셀러 소설 《모정》

한쑤인의 소설 《모정》.

한쑤인은 1952년 이언 모리슨과의 만남을 소재로 한 소설 《모정(慕情·A Many–Splendored Thing)》을 썼다. 《모정》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녀는 이언 모리슨과의 만남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내 집에는 문이 두 개 있다(My House Has Two Doors)》도 썼다.

첫 남편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연인 이언 모리슨은 한국전쟁에서 잃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쑤인은 중국 공산당의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아침의 대홍수: 마오쩌둥과 중국혁명》 등 소설을 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정》이 한국에서는 다소 늦게 번역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 《모정》에는 한국전쟁의 현장에서 이언 모리슨(소설에는 마크 엘리어츠라는 이름으로 등장)이 보낸 21통의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첫 번째 편지는 1950년 7월 13일 보낸 것인데, 7월 10일 신문사에 첫 송고를 하고 난 며칠 뒤였다. 마지막 21번째 편지는 세상을 떠나던 날 보낸 것이었다. 이 중에서 7월 12일 자 첫 번째 편지, 8월 8일 자 17번째 편지, 그리고 맨 마지막 8월 12일 자 편지 전문(全文)을 소개한다(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매우 좋은 민족”(첫 번째 편지, 1950년 7월 13일)

〈이번은 전에 내가 말레이시아, 뉴기니,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불유쾌한 임무라고 할 수 있지. 오늘 아침에 데이비드가 돌아갔어. 그는 그동안 고통스런 나날에 지쳤었나 봐. 그래도 어찌 됐건 나는 보도하는 직업을 가진 기자 출신으로 이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하는 직무를 가졌기에 나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8년 전 미군 부대에 특파원으로 있던 때로 되돌아간 느낌도 있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어려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에 휘말린 무고한 사람들, 고통받는 인간들.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대자연과 대조되고, 희망과 미래는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것 같은…. 나는 이런 것들을 전에 겪어 본 것 같아.

그리고 한국인들은 매우 좋은 민족(such nice people)이야. 많은 사람이 이미 죽어 가고 있어. 이 ‘불유쾌함’이 끝나면 많은 한국인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종종 들어.〉

포로, 피란민, 부상자(17번째 편지, 8월 8일)

〈세 가지 광경이 늘 나를 미치게 해. 포로, 피란민, 부상자. 이유는 똑같아. 그들의 참을 수 없는 조건이지. 오늘 우리는 북한군 포로 10명을 실은 트럭을 지나갔어. 젊은이들은 모두 삭발되었고, 두 손은 새끼줄로 트럭의 칸막이에 묶였으며, 목에는 명패가 걸려 있었어. 부상자들도 목 근처에 명패가 걸려 있어.

공산주의자와 비(非)공산주의자의 철학의 근본적 차이는 한 사람에게 개인이 될 수 있거나 아니면 단지 그들의 목에 명패를 거는 단순한 장치인가? 그렇지만 어쩌면 혼란하고 기근이 난 이 세상은 이미 너무 복잡한 장소가 되어 민생의 처리가 시급하다 보니, 이 두 세계는 어쩔 수 없이 팻말을 벗을 수 없나 봐. 난 모르겠어. 당신은 알겠어?〉

“오, 쑤인, 나는 이렇게 행복해”(21번째 편지, 8월 12일)

〈당신이 나에게 해온 가장 감동적인 말은, 마음속에서 영원히 나를 기다리겠다는 거야. 내가 여기에 건너온 이후로 똑같은 생각을 자주 했어. 사랑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알아? 당신은 나에게 답들을 준 적이 있어.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주기도 했지.

어젯밤에 나는 침대에 누워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의 시 ‘낯설지 않은 땅에서(In No Strange Land)’를 애써 회상해 보았어. 대부분 떠오르더라고. 당신도 이 시를 알기 바라. 당신을 위해 몇 줄을 써볼게.

천사들은 오랜 장소를 지킨다한 바위를 돌아 날개를 편다!그래 이것은 당신의 낯설어진 얼굴 그것은 많이 빛나는 것을 아쉬워한다.

The angels keep their ancient places;–Turn but a stone and start a wing!‘Tis ye, ‘tis your estranged facesThat miss the many-splendored thing.

겉으로 보면 나는 매우 자족하여 마음속에 당신의 사랑을 담고 있어. 이것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고, 나는 내 존재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고 있지. 신(神)은 우리를 그렇게 총애하셨어. 언젠가 누가 나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어. 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 비극이 아닐까?

오, 쑤인, 나는 이렇게 행복해. 우리 당신과 나는, 우리는 잃어버리지 않아. 우리는 그 많이 빛나는 것(the many-splendored thing)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소설 속 편지에 나타난 이언 모리슨은 한국을 몹시 사랑하고 전쟁의 비극적인 참상에 분노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많이 빛나는 것’이라는 가사도 이언 모리슨이 쓴 편지의 구절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마지막 편지에. 이 모두가 기가 막힌 하나의 각본과 같은 스토리라고 생각되어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모정〉

헨리 킹 감독이 연출한 영화 〈모정〉(1955).

한쑤인의 소설 《모정》은 1955년에 영화화되었으나 한국에서 상영된 것은 1972년이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1학년 겨울 무렵에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그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음 날 반 친구들끼리는 “어제 잠 잘 잤나?” 하며 짓궂은 영화 감상평을 하기도 하였다. 사춘기 고등학생들의 ‘흥분’을 자아낼 만큼 노골적인 장면이 많았던 영화였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자막에 ‘한국전쟁’이란 글자가 나오고 비행기가 지나가는 부분이었다. 감독은 헨리 킹이 맡았는데 그는 영화배우이자 감독으로 〈킬리만자로의 눈〉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정오의 출격〉 등을 만들었다. 여주인공 제니퍼 존스는 미국 여배우로 매우 예쁘면서 고전적인 미(美)를 보여 준다. 특히 그녀가 입고 나오는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무기여 잘 있거라〉에도 여주인공으로 나왔다. 윌리엄 홀든이 기자인 남자 주인공 마크 엘리어츠 역을 맡았는데 그 실제 인물이 바로 이언 모리슨이다. 영화는 소설의 내용과는 약간 다르게 각색되었다.

이 영화는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게 주제곡이다. 영화의 중간 중간에도 끊임없이 멜로디로 배경음악을 깔던 주제곡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가사가 나오는 웅장한 노래로 마무리된다. 홍콩이라는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빅토리아 언덕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은 많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영어 원문과 한글로 번역한 가사 내용도 참 좋아서 소개한다.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It’s the April rose that only grows in the early spring.Love is nature’s way of giving a reason to be living,The golden crown that makes a man a king.Once - on a high and windy hill,In the morning mist, two lovers kissed and the world stood still,Then your fingers touched my silent heart and taught how to sing.Yes, true love’s a many-splendored thing.

사랑은 아름다워라 초봄에 피어난 4월의 장미처럼사랑은 삶에 의미를 주는 자연의 섭리보통 남자를 왕으로 만드는 황금의 왕관바람 부는 높은 언덕에서아침 안개 속에 연인이 입을 맞추네, 세상도 숨을 멈추네그대 손이 와닿아 내 고요한 가슴 노래하네진실한 사랑은 눈부시게 아름다워라.〉

이언 모리슨 기념사업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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