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지난 6월 22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은 시구가 새겨진 ‘이순신 장도’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던 장도의 길이는 약 2m에 달하며,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한 쌍이 각각 칼집을 갖추고 있다. 칼에는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장도가 국보로 지정되자 수면 아래에 있던 이순신의 ‘칼’ 진위 논쟁이 다시 불붙는 모양새다. 현존하는 충무공 관련 칼은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현충사 소장 장도 1쌍과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명나라 신종이 선물했다는 귀도 1쌍과 참도 1쌍 등이다. 더불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쌍룡검’이라는 1쌍의 칼이 더 있다. 이들 칼에 대해서는 그동안 역사적 문헌을 근거로 다양한 진위 논쟁이 있어왔다.
일본풍 도검, 후대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최근 국보 지정이 예고된 ‘장도’의 경우 가짜 주장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제기됐었다. 문화재청은 ‘이순신 장도’는 제작연대와 제작자가 명확하고 내력이 분명하며 조선 도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추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온라인 카페를 중심으로 이 도검에 대해 “디자인이 일본풍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모조품(가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선 장도가 당시 조선의 국왕인 선조가 하사한 도검이 아니라는 주장부터 제기된다. 군 통례나 법도 등을 볼 때 선조가 하사한 왕검이 진짜인데 장도는 그 모양이 하사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장도가 국왕 하사 검이 아닌 것은 맞지만 칼자루 속에 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인 슴베에 새겨진 글귀로 갑오년(1594년)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든 도검임을 알 수 있고,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봐도 이것이 진품임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1795년 간행된 충무공 유고 전집인 이충무공전서에는 “검명이 있는데 장검 1쌍에 나누어 새겼다. 검명은 공(충무공)이 쓴 글씨이고 지금 공의 후손집에 있다”고 적혀 있다. 실제 해당 장검은 충무공 종가에서 계속 전해내려오다가 현충사에 맡겨 보관하던 것이다. 장도가 일본풍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문화재청은 일본 도검의 요소도 일부 발견되지만 일본 도검이 아니라 도검 기술이 발달했던 일본 도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사라진 ‘쌍룡검’과 관련된 논쟁도 있어왔다. 쌍룡검의 유일한 기록은 조선고서간행회가 1910년 궁내부박물관 소장 유물을 촬영해 실은 ‘조선미술대관’에 기록된 사진과 기록이다. 책에는 사진과 함께 이러한 기록이 있다.
“이 사진의 칼은 임진왜란 때 수군을 이끌고 우리(일본) 군대와 힘써 싸웠던 이순신이 항상 차고 있던 물건으로 왼쪽에 문장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러운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현재 이 칼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지만 충무공의 한시 ‘서해맹산’이 인용되어 있어 실제 이 칼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칼에 새겨진 내용이 언급된 다른 자료도 있어 일단 해당 쌍룡검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박종경(朴宗慶·1765~1817)의 ‘돈암집(敦巖集)’에 실린 원융검기(元戎劍紀)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훈련대장 박종경은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서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鑄得雙龍劒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은 “쌍룡검은 후대에 충무공 관련 기록에서도 발견된다”며 “유신환(兪莘煥·1801〜1859)이 이순신 사당에 소장된 쌍룡검에 대한 ‘이충무공쌍검명(李忠武公雙劒銘) 병서(幷序)’를 적으며 쌍검의 위대성을 칭송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 병서에는 이순신의 9세손인 이완희(李完熙 1813〜1860)가 유신환에게 쌍검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충무공의 사당에 보검 한 쌍을 둔 것은 공(충무공)과 더불어 딸려 있게 하여 공을 이룬 것이다. 공의 9세손 완희가 내게 이를 꺼내어 보이니, 길이는 한 길 남짓하고 그 칼날은 숫돌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시퍼렇다. 이를 휘두르면 바람이 부는 듯 사람이 한산 아래에 있는 것 같다.”
행방 묘연한 쌍룡검 논쟁
하지만 이 쌍룡검에 대해서도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이순신처럼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1726년 12월~1727년 12월)한 이복연이 충무공을 존경해 제작한 검인데, 박종경이 이를 충무공의 검으로 오해했고, 1910년 ‘조선미술대관’ 역시 이러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론이다.
충무공 영령에 제향을 올리는 위패 사당인 경남 통영시 충렬사에 소장된 보물 제440호 ‘충렬사 팔사품(忠烈祠八賜品)’ 가운데 귀도(鬼刀)와 참도(斬刀) 각각 한 쌍을 둘러싸고도 역시 논쟁이 있어왔다. 팔사품은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명(明) 황제 신종이 이순신의 무공을 치하하며 명의 도독(군통수권자)으로 임명하기 위해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 황제의 포상물은 총 8품 15점인데 그 가운데 귀도와 참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들도 명 황제가 충무공에게 직접 내린 물건이 아니라 이순신 가족에게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장군이 선물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왔다. 한국과 중국 양국의 역사 문헌에 팔사품 관련 기록이 없고, 이순신을 도독으로 임명하려고 내린 관인 인장이 개인적으로 판 사인(私印)이며, 다른 팔사품 가운데 임진왜란이 아닌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도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이런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 임금이 지은 ‘어제이순신신도비’에 “진린이 이순신의 재주와 기량에 심복하여 모든 군중의 기밀을 그에게 물어서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고, 우리의 선조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고 하였다. 또 명나라 황제에게 자세히 아뢰니 충무에게 도독인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과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 도설’에 “수군도독 진린이 전공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가상히 여기고 공(충무공)에게 도독인과 영패, 귀도, 참도, 도독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을 하사하였는데, 지금까지 통제영에 있고 팔사품이라 이름한다”는 기록을 근거로 반대 주장도 나온다. ‘어제이순신신도비’에 도독인의 내용이 있고, ‘이충무공전서 도설’에 팔사품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면 부정할 수 없으므로 앞으로 신중한 검토와 연구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한 자문과 감수는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