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3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 12~4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6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유령의 마음으로(임선우), ‘마음에 없는 소리(김지연)’ 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짝을 잃은 슬픔은 몸을 바꾸라고 들쑤시는데...
임선우의 『유령의 마음으로』(민음사)는 변신에 관한 이야기이자 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변신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자, ‘반려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의 삭힘이다. 이 두 가지 제재는 은밀한 인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동반자의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변신에의 욕망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변신의 욕망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변신은 욕망을 넘어 소재가 되어 실제로 일어난다. 가상현실이 증강현실이 되어 가는 시대에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허구적 도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식물이 되고 싶어도 되지 않아서 채식주의자가 된 인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무와 유령과 해파리와 고양이로 자유롭게 몸을 바꾼다.
하지만 이 변신으로의 길은 아주 다채로운 단계들을 포함하고 있다. 몸을 바꾸려면 궁리도 하고 계획도 하고 준비도 하고 날도 잡아야 하고 의뢰도 해야 하고 대행도 해야 하고, 마침내 실행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주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망설이고 포기하고 실패하고 재도전하고 하는 계기들도 겹친다. 그런 다양한 단계들을 작가는 매우 매끄럽게 표현해서 독자들의 눈을 간질인다.
그러나 실제 이 작품들이 암시하는 중요한 주제는 다른 데에 있다. 여전히 인간들은 사람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데 집착해서, 그 모습이 변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뿐 아니라, 주변의 사물들과 동물들과 심지어 자신이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변신체로 취급하여 혹은 그렇게 만들어, “수군거림과 욕설, 배척의 순서를 착실하게 밟아나가”(p.113)면서, 배척하고, 경멸하고 학대하고 돈벌이로 이용하고, 쥐었다 놓았다 하고, 접었다 펼쳤다, 주물렀다 굴렸다 하면서, 타자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데서 새디스트적 희열을 만끽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인간주의의 향락에는 변신을 꿈꾸는 이들까지도 감염되어서, 변신을 감행한 이에게 침을 뱉는 모욕을 가하니, 이는 실로 변신 욕망 뒤에 숨은 자기 고집의 무서운 전면성, 거대한 집단 무의식을 언뜻 엿보는 공포에 직면케 한다. 그 공포는, 소위 N번 방이 그런 현대인의 욕망이 극단화된 곳이지, 느닷없이 어떤 악마가 출현한 장소가 아니다, 라는 깨달음까지도 유도할 수 있다.
작가의 글쓰기는 그 공포를 날쌔게 스쳐간다.
의뢰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은 아까 전부터 사이트 의뢰 게시판을 새로 고친 중이었다. 나를 지키려고 남을 해치는 사람들이요. 주경아, 그건 모두가 그래. 감독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p.193)
과 같은 ‘지나가는 말’은 요점을 짚으면서 그걸 단순화한다. 요컨대 평범화한다. “악의 평범성”을 말한 사람이 한나 아렌트였던가? 하지만 이 평범성을 절실히 느끼기 위해서는 이 평범함을 단순하게가 아니라 집요하게, 복잡하게, 지긋지긋하게 파헤쳐야 할 경우도 만나야만 할 것이다. 스스로 잠시나마 자기 고집을 버리는 것, 그것을 작가는 헛것이 되는 것으로, 즉 “유령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만, 세상의 타자들을, 온 생명을, 동등한 정신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니, 유령의 마음이 유령의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 생명체는 하세월을 앞두고 있다.
◊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로’
실바람은 불어도 내 마음의 풍선은 꺼지는구나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03)는 특이한 문체를 보여준다. 작가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을 시시콜콜히 전달한다. 그래서 마치 삶의 과정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한동안 이런 디테일의 촘촘함을 두고 리얼리즘 운운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내 머릿속에서 보는 것은, 내 펜으로 내려와 내가 보았던 것이 된다.”(샹플뢰리,『리얼리즘』, 1857)는 순진한 실재론은 글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다. 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미널리즘을 리얼리즘이라고 착각”(「한국 소설의 가능성」)하는 꼴이다. 붕어빵이란 글자를 뜯어먹고 배부른 척 게트림을 하는 건 ‘완전’ 코메디가 아닌가(하긴 조선 시대에 이런 희극이 일상적으로 벌어진 게 또 하나의 리얼리티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이 소박한 모사론을 넘어선다고 자랑하며, 소위 ‘전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갖춘 것이 이른바 ‘비판적 사실주의’이다. 하지만, 그 역시 리얼리즘론이란 게 결국은 현실조작론에 불과하다는 걸 자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전형이라는 걸 누가 확신을 갖고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 대한 모든 ‘이해’는 ‘다소간 의미심장한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삶의 진행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체적 묘사들에 매료되고, 그것을 바로 현실 그 자체로 착각한다. 샹플뢰리가 그의 책에서 제사로 쓴 “자연스런 문체를 볼 때, 우리는 놀라고 매혹된다”는 파스칼의 말처럼 말이다.
김지연의 소설이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런 착각의 심장부이다. 지극히 자연스런 일상적 대화들이 끝없이 지속되는데, 이 말들은 거의 대부분 “마음에 없는 소리”들이다. 작품집의 제목은 그렇게 정해졌다. 이 속 없는 소리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완전히 무의미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의미를 감춘 말이다.
무의미한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형식상의 인간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가령 우연히 만난 치매할머니가 이름을 묻자 무심중에 틀린 이름을 말한다. 그때 그 이름은 오로지 접촉의 기능만을 가진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실제 자신과 대화가 끊긴 동생의 이름이다. 치매할머니와 그 일행에게는 그런 숨은 사연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화자인 나에게는, 그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발설하는 데에 무언가 절실한 감정이 숨어 있다. 이 소설들 속에는 이렇게 속마음을 감추는 말들이 온갖 다양한 양태로 출현한다.
가령 다음 대목은 그런 속마음이 무척 엉뚱하게도 표현되는 사례다.
“앗, 제가 잘못 봤나봐요. 눈이 안 옵니다.”
“눈 보고싶다.”
“눈 좋아해?”
“넌 싫어해?”
“응, 민정이가 감기 잘 걸리거든. 찬바람 맞으면 안 되는데 눈 오면 참을 수가 없잖아.”
“그러면 실은 엄청 좋아하는 거네.”
반장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p.67)
이 대화는 고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던 친구가 동창의 사과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서는 실은 친구를 좋아한다는 심사를 노출하고 있는 대목이다. 속마음에 대한 암시는 이렇게 사방에서 은폐의 아스팔트를 뚫고 솟아오른다. 그 다양성은 어떤 필사적인 감정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의 인물들은 두 가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심각한 갈등도 없고 때로 화목하기도 한 교제를 이어가지만 실상 그 교류는 쓸데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삶은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으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고 때마다 어떤 암시를 보내며 상대방이 알아주길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 기대가 좌절되면 관계가 끝날 정도로 그것을 절박하다.
아무것도 안 말해줄 거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 뭐하러 그러냐니. 이렇게 같이 있다는 기분이 안 들게 할 거면(p.34)
그런데 그 진짜 속마음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나체로 수영하고 싶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들에게 진정 의미있는 어떤 것이 현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며, 그들 자신도 그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의 삶의 부박함을 독자에게 전달하며, 산다는 것에 대한 쓸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우리는 문명과 선진 사회가 제공하는 자유와 부를 향락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 그것이 무슨 유산이 되겠는가? 그래 봤자 먼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우리의 살을 곧 부패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길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읽으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쨌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구절을 보자.
언덕길을 지나다 경치가 좋은 공터를 발견했을 때에는 미셸에게 잠깐 쉬었다 가자고 말한 후 차를 세우고 내렸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주 지나던 곳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런 곳들은 아주 많았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곳. 언덕이라 바람이 더 세게 불었지만 공기가 쾌청해 콧속이며 머릿속,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p.54)
“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바람은 더 세게 불”고, “공기[는] 쾌청해 콧속이며 머릿속,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콧속마저도!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이제 트럭을 타고 공장으로 돌아가면, 충만한 의미로 포장된 무의미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저 대목을 다음 노래에 포개 놓아 보자.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신중현,「아름다운 강산」)
한국인의 90%는 이 노래를 알고 있다. 이 노래와 직전의 묘사가 내포한 감정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노래는 우리를 춤추게 하는데, 앞의 묘사는 우리를 맥빠지게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의 막바지에서 독자는 이 좌절과 약동 사이의 아득한 심연에 머리가 하얗게 비워질 것이다. 그리고 암벽 등반가처럼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고 싶다는 충동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 소설들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구효서·소설가
◊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이 작가 참 소설을 무지 재밌고 착하게 잘 쓰네, 라고 생각하던 차에 “기특하고 예쁘다.”(16쪽)라는 문장이 휙 지나간다. 아닌 게 아니라 임선우는 소설을 기특하고 예쁘게 쓴다.
그런데 느닷없이 유령이 튀어나온다. 사람이 한순간 해파리로 변해버리거나 나무가 되어 옴짝달싹 못한다. 위 아랫집 사이에 구멍이 뚫리고, 사람을 산 채로 묻어버린다. 소설의 종결부도 아닌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폭우에 떨어져 내린 중화요리집 간판에 뒷머리를 맞고 즉사한다. 기괴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충분히 기이하다.
이 자리에서만 기괴와 기이의 차이점을 임의로 나누건대, 기괴가 이상하고 무서운 얘기로 끝나는 반면 기이는 이상하지만 기특하고 예쁘게 끝난다. 이상하거나 무섭게 시작한 이야기를 기특하고 예쁘게 끝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에 성공할 경우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평가에 찬사의 프리미엄이 얹힌다.
기괴하든 기이하든 임선우의 소설이 기담임에는 틀림없다. 기담이란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하는데 임선우의 소설이 기담의 요건을 고루 갖추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신기하고 이상한 소재 자체가 주는 야릇한 재미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임선우 소설에서의 야릇함이란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사태를 어쨌거나 기특하고 예쁘게 끌고 가 마무리하는 솜씨에 있다고 하겠다.
가만히 보면 여타 기담과는 달리 임선우 소설에서는 기인이라든가 비존재 혹은 이상한 사태와 정황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것들은 나와 너 친구 이웃을 한 곳에 모으게 하는 수단과 장치로서의 역할에 머물 뿐이다. 유별난 사태일수록 주변의 인물을 신속히 모여들게 하고 위태로운 상황일수록 대처하는 인물들의 결속력은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사태 이전과 이후 사이에 놓이게 되는 정동(情動-affective)의 효과 또한 극대화된다.
이처럼 유별난 사태를 겪으면서 어느새 변화된 인물들의 관계가 인물들 스스로도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라서 신기할 뿐만 아니라 실의에 빠졌던 인물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 소생하는 빛과 힘과 믿음의 온기를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모든 변화가 ‘어느새’ 이루어지고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듯이, 한사코 방목되는 듯하던 작가의 의도들이 석양의 때가 되어 시나브로 서사의 집으로 하나 둘 돌아오는 구성을 어찌 유령보다 더 야릇하다 아니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구성을 통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수백 장의 이력서를 쓰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취준생의 죽음을, 연인을 잃고 나무가 되어 정지해버린 남자의 고독을, 해파리로 변한 여성의 마지막 소원을 어루만지듯 가만가만 필사해내는 작가의 펜 끝이 기특하고 예쁘다.
◊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등단작 <작정기>를 포함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김지연의 첫 소설집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 당선작이라는 화제를 모았던 작품의 작가답게 김지연은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에서도 특유의 “나약한 말들”(125쪽)과 “마음에 없는 소리”(159쪽)들로 자신만의 소설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작정기’라는 말도 소설을 읽기 전에는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정원을 만드는 법’ 혹은 ‘정원을 만든 기록’이라는 의미의 한자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소설 어디에다 어떻게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인지 찾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김지연의 언어가 곧이곧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귀띔하고 에두르고 변죽을 울리는 ‘나약한 말’이거나 ‘마음에 없는 소리’이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이는 문학이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은유의 기술이며, 신화나 픽션 창조의 필수 요건이라는 점을 작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김지연의 소설 읽기는 그래서 숨은그림찾기의 숨은 정원을 찾아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힌트는 “큰 것을 무화시키는 작은 이름들”(100쪽)이며 “원래 통용되는 의미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의미로 조합”(282쪽)되는 장소다. 거시의, 지배의, 기득과 다수의 큰 세계에서 통용되던 의미의 장소에서 완전히 다른 빛과 공기와 온도와 이름으로 조합되는 작은 은유의 장소로의 이동.
김지연이 만드는 작은 은유의 정원엔 특별히 젠더, 부, 성적 소수자 혹은 약자들의 자리가 마련된다. 그들의 절망과 분노와 사랑의 실제들로 가꾸어지는 작정기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넘어 다만 오롯하고 오롯하기에 큰 것 따위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발가벗고 수영하려고 여 제자 진영과 함께 찾는 인적 드문 해변(<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삼천년 된 녹나무 앞에 선 진원과 나(<작정기>),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우는 가로등 불빛 녹아드는 방(<내가 울기 시작할 때)>, 결혼도 섹스도 없이 사랑하는 영지와 은호(<사랑하는 일>)의 정원들은 큰 것에 한눈파는 이에게는 아직 눈에 띄지 않는 애틋한 숨은 그림이다.
◇이승우·소설가
◊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마련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사람이 자기 방에서 나무가 되어 버린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하는 말이다. 그는 열아홉 살 때 겪은 어떤 일 이후로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임선우의 단편들을 읽으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유령과 함께 살거나 사람이 해파리로 변하거나 나무로 변하는 일. 그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나 임선우의 환상, 혹은 변신 이야기는 괴이하지 않고 부자연스럽지도 않다. 작가의 사실적인 서술과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전개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들을 일상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괴이하거나 부자연스러운 환상이 아니라 유쾌한 상상으로 읽게 한다. 심지어 친근한 느낌마저 준다.
생각해 보면 유령이 나오고 사람이 나무가 되고 하는 이야기는 좀 흔하고 익숙한 것이다. 이 작가는 소재의 참신함을 욕심내는 대신 통속적일 수 있는 소재를 택해 참신한 생각의 길을 연다. 자극적인 소재나 흥미 위주의 이야깃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본질적인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외로움과 상실, 구원과 같은 주제로 끌고 간다.
가령 표제작인 ‘유령의 마음으로’에서, 나의 분신인 유령은 언제 출현하는가. “오늘 낮에 몸이 엄청 추워지더니 유령이 나타났어.”라고 ‘나’는 말한다. 유령이 옆에 있으면 따뜻함을 느끼고 잠도 잘 잔다. 나중에는 유령에게 어깨 좀 펴, 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곧 자기에게 하는 말이다. 객관적 시선으로 자기를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이 인물이 스스로 만든 마음의 감옥에서 나올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마침내 ‘나’는 몇 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정수’에게 마음의 부담 없이 작별의 인사를 한다. 웅크리고 있던 마음을 펴기 위해, 극복하고 재기하기 위해 이런 정도로 마음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읽는 사람을 울컥하게 한다. 알 수 없는 온기가 읽는 사람의 가슴에 퍼져 따뜻하게 하는 소설이다.
◊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의 문장들에는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의 당당함이 있다. 가릴 것 없다는 듯 솔직하고 잘 보일 이유 없다는 듯 거침이 없다. 일상적 언어에 섬세한 묘사 대신 인물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문장들은 성글기까지 한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끌린다. 세밀한 심리묘사는 일종의 화장술이라는 생각을, 김지연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하게 된다.
문장에 대한 이런 인상은 플롯에 대해서도 이어지는데, 설마 그럴 리 없을 텐데도 플롯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글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흡인력이 있다. 단순한 구조 안에 인물들을 최대한 자유롭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그 역동성에 의해 아이러니를 발생하게 하는 기교가 만만치 않게 여겨진다. 구조의 복잡함 또한 일종의 화장술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예컨대 이 소설집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소설은 길 위에 인물들을 풀어놓고, 어떤 소설은 고향에서 며칠을 경험하게 한다. 인물들의 행동에 반드시 인과적 필연성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소설의 결말을 서사의 완성으로 매듭지으려는 의지도 있는 것 같지 않다. 삶의 한 장면을 잘라 보여주는 것 같은 그의 소설은 이것이야말로 리얼리티, 꾸밈없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플롯의 정치함이 아니라 의미의 풍부함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때문에 그의 소설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데, 익숙하면서도 어떤 소설과도 같지 않아서 빠져들어 읽게 한다. 기시감은 일종의 미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끼를 물고 들어가면 김지연의 개성이 기다리고 있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의 진솔함 같은 것. 숨기지 않았는데도, 아니, 그래서 도리어 오래 들여다보아야 하는 아이러니 같은 것.
◇김인숙·소설가
◊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나무가 되어버린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연인에게 일방적으로 결별을 통보받았고, 갓 제대를 하였고, 연인이 결별 통보와 함께 함께 살던 원룸을 처분해버렸으므로 갈곳이 없다. 갈 곳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집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더 클 것이다. 헤어진 것들, 지나간 것들, 그리고 다시 대면해야할 것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사람. 너무 심하게는 다치지 않게, 너무 아프게는 성나지 않게 잠시 가만히 서있어야 하는 사람. 그래서 발에 뿌리가 내리고, 이 남자는 나무가 되어버린다. 이제는 남의 집이 된 전 연인의 방에서. 그리고 그 방의 새 주인인 여자는 생면부지의 이 남자- 이 나무에 물을 주며 이 남자-이 나무가 스스로 떠나주기를 기다린다.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연인을 돌보는 여자가 있다. 연인이 회생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여자의 마음. 그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어느날 자기 몸에서 쑥 빠져나와 유령처럼 존재하는 제2의 자신이다. 유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아파하면 같이 아프고, 기뻐하면 같이 기쁠 뿐이다. 그러나 기실 이 유령은 모든 것을 다 하는 셈인데, 내 마음을 내 마음 바깥에서 보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우는 것을 내가 보고, 내가 웃는 것을 내가 보는 것.
다친 마음들을 드러내는 임선우의 방식 중 하나는 ‘환상’, 일종의 ‘작위’다. 의도적인 작위다. 제대로 묘사되지 못하는, 혹은 과장되거나 폄훼되는 현실과 인물의 묘사보다는 오히려 작위가 나을 수도 있다. 설정된 작위는 또다른 렌즈로 작용하여 결단코 작위적일 수 없는 현실을 되비친다. 함부로 말하기 힘든 화자의 내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죽고 싶은 이유를 수십가지나 가지고서도, 자기 같은 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밤마다 엉엉 울면서도, 아침이면 일어나 허기를 느끼고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포만해지는 게 사람’ 아니냐고, 단편소설 ‘내가 울기 시작할 때’의 화자는 말한다. “그런 사소한 이유로 살고 있는 거냐’고 묻는 사람에게 ‘그런 사소한 이유로 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 아니냐’고 답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이유들. 그런 사소한 이유들로 사소하게 가득찬 것이 삶인데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공을 들여야한다” 고 ‘마음에 없는 소리’에서는 또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나는 이제야 겨우 살아가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김지연의 소실집 ‘마음에 없는 소리’에 실린 아홉편의 단편 소설들이 보여주는 것은 겨우, 고작, 이까짓 것들인 일상들. 그 일상을 ‘그냥, 그냥’ 말하는 김지연의 소설들은 마음을 전하는 소리로 읽힌다. 가만히 말하는 소리들, 하나도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소리들. 그러나 그 소리들이 겹을 이루어 쌓이면 삶의 어느 한 부분을 슬쩍 들추어보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무심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은, 실은 ‘그런 사소한 것들로 쓰여지는 게 소설 아니냐’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김지연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에 실린 소설들에는 여성 연인들이 등장한다. 퀴어소설은 더이상 낯설지 않은 바, 그 자체로서 눈을 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향은 김지연만의 방식으로 눈을 끈다. 그들은 다른 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차별을 당하는 인물들이지만, 예컨데 공원에서 여자친구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는 이유로 지나가던 노인에게 폭행을 당하고 ‘더러운 것들’이라는 욕을 먹고, 그래서 고작 차 안에서나 ‘마음껏 껴안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말하자면 그들을 떠밀어내는 사회의 경계에 매달린 채 간신간신히 살아가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에게도 당연히 그들만의 일상이 있다. 집을 상속받아야 하고,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고, 늙어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들. 이 일상의 난망함과 괴로움은 퀴어라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삶, 개인의 삶으로서 특별할 뿐이다. 모두의 것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지만 개인의 것으로는 각별할 수 밖에 없는 일상은 이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또 ‘그냥, 그냥’ 하는 듯한 김지연의 목소리는 다정하게 들린다. 특별함을 들춰내는 대신 각별함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음에 대한 욕망, 서로 걱정하고 서로의 일로 쫄리고 싶은 마음, 같이 늙어가는 일에 대한 소망. 연인이 있을 때 각별해지는 마음들이다. 그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 아마도 ‘그냥’ 말하는 것일 터. 김지연의 소설들이 그렇다.
◇김동식·문학평론가
◊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의 소설에는 일상과 환상이 공존한다. 내 방으로 나무 인간이 들어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내기도 하고, 나의 감정을 완전하게 느끼는 유령이 출현하기도 한다. 임선우의 소설에서 환상은, 다른 차원의 낯선 세계가 현실 세계에 밀고 들어오는 방식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이 마치 백일몽처럼 드러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의 일상적인 무의식으로부터 생겨나서, 우리의 일상생활 곁에 자리를 잡은 환상적인 것들, 임선우 소설의 특징적인 장면이라 할 것이다.
단편 「유령의 마음으로」의 주인공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26세의 여성이다. 식물인간으로 2년째 병원에 누워있는 남자친구 정수를, 매주 토요일마다 방문한다. 졸음과 한기를 느끼던 어느 날 자신의 몸에서 유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생겨난다. 유령은 그녀와 똑같이 생겼고,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다. 유령과 함께 생활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자신이 억누르고 있었던 마음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정수에 대한 사람이 소멸해 버렸다는 것. 정수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돌아온 날, 유령은 사라진다. 그 자리에 유령의 마음이 남는다.
유령은 마음의 거울이자 무의식의 스크린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유령의 마음은 무엇일까. 유령이 알려준 것은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을 타자화하는 억압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감정이 소멸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면서 자신의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유령이 넌지시 알려준 것이다. 마음은 감정이 깃드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유령의 마음이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환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선우의 소설에는 죄의식, 애욕, 번뇌, 불안, 연민 등의 격렬한 감정들이 출몰하는 마음의 극장은 없다. 마음은 감정의 환대가 일어나는 장소라는 소박한 이야기를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온화한 분위기의 소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마음이 유령처럼 어른거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