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3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 12~2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4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그들의 이해관계’(임현), ‘은의 세계(위수정)’ 입니다.


소설가 임현. /문학동네 제공


소설가 위수정./문학동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임현의 『그들의 이해관계』(문학동네, 2022.03)은 불안에 관한 이야기들로 수런거린다. 9편의 작품에 ‘불안’이라는 단어가 23번 등장한다. 작품을 읽다 보면 어디서 또 불안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지 몰라 썩 불안해진다.

불안에 대한 대체적인 해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지하게 된 사람의 마음 속에 일어난 부정적 감정”이다. 이 불안은 두 방향으로 나뉜다. 원인의 당사자가 자신일 때, 그 불안은 스스로 알 수 없는 어떤 충동에 대한 불안이다. 반면 원인의 당사자가 바깥의 대상이나 타인일 때, 그 불안은 타자의 정체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전자는 실제 무의식적으로는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걸 거부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충동과 그 충동이 가져 올 효과에 대한 불안이다. 후자의 불안은 말 그대로 ‘몰라서’ 생기는 불안, 즉 명명 불가능성에 대한 불안이다.

임현 소설의 불안에는 이 두 개의 불안이 포개져 있다. 상대방의 행동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한데, 실은 상대방의 행동 자체가 불안으로 인한 것이다. 또한 상대방으로 인하여 생긴 나의 불안은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는 예감으로 자신의 충동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도경도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게 당장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어쩌면 내가 도경을 부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줄곧 한곳만 바라보고 모른 척할 만한 이유라면 아무래도 그래서이지 않았을까. 도경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지 않았나. 본래 그래야 맞는다는 것처럼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내가 방금 해주를 부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랬으므로 다 듣고 있지만 애써 안 들리는 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난처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텐데, 다른 것 없이 오직 내가 도경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유일한 원인이지 않았을까.”(p.46)

이 불안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 사람”이고, 또 나쁜 사람으로서 무슨 일을 했을지 혹은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치솟는다. 그런데 바로 이 불안의 절벽 끝자리가 도약의 스프링보드다. 화자는 여전히 불안 속에 휩싸여 있지만 독자는 이게 사랑의 형식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타인을 끌어당겨 내 안에서 나와 하나로 만드는 일인데, 실제로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끌어당겨 상대방 안에서 나를 그와 하나로 만드는 방식으로만 실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호적일 때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되면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 된다. 게다가 일방적 진행은 하나됨이 아니라 잡아먹고 먹히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사랑은 재앙에 대한 불안으로 배수진을 치고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향해, 두 방향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하며 나갈 수밖에 없다.

사랑은 불안의 원천이자 불안의 형식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불안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책인 것이다. 사랑에 신비가 있다면 이게 그것이다.

임현의 소설이 그런 사랑의 신비를 짐작하게 만드는 효력이 있다면 독자는 또한 이어서 물어봐야 하리라.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어떻게 할 건데?


◊ 위수정 ‘은의 세계’

위수정의 『은의 세계』(문학동네, 2022.03)에 실린 소설들은 공간 묘사가 뛰어나다. 가령 표제작을 보자. 두 주인공이 있다. 어떤 극적인 사연이 있어서 그들은 동거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연은 어떤 전개를 낳지 않는다. 펜의 카메라는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오래된 부부처럼 살고 있는, 무덤덤하면서도, 분명한 선을 두고 독립과 협력을 잘 조정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일상을 비춘다. 이 두 사람의 공간 사이를 비집고 여자의 동생이자 남자의 ‘처제’인 사람이 끼어든다. 진짜 처제는 아니어서 ‘양처제’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은 앞의 두 사람과 아무 것도 닮은 바가 없다. 둘은 특이하지만 직장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해 살고, 처제는 빈번히 직장에서 쫒겨나거나 스스로 나와서 직업을 전전한다. 둘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사람들이고 처제는 “혼자 있는 사람 같”은 사람이다. 둘 중의 남자는 살림 도우미로 드나드는 처제가 가면 꼭 “욕실과 부엌까지 소독제를 뿌린다. 언니는 동생을 끊임없이 흉보면서도 그를 도와준다. 그리고 이 두 종류 사람들 옆, 대각선 방향에서 유모차에 실린 강아지가 끼어들며, 그들의 기묘한 어긋남에 특이한 질감을 준다.

오로지 여기에는 공간적 대비만 있다. 행동도, 대화도, 배경도...분명 이 공간을 낳은 시간은 있으나, 그 시간은 “터널”과도 같이 통과했을 뿐, 더 이상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기로 기능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시간터널/공간독립 현상은, 이 시대를 불모성의 시대로 인식하는 젊은 세대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들으면 더욱 그렇다.

하나야, 우리도 아기 가질까?

하나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지금 이 시대에?

지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농담. (37쪽)

그러나 ‘시대에 대한 부인’은 생각의 깊이는 배제된 채로 부유한다. 다시 말해 탐구되지 않는다. 대신 쉼없이 장면들만이 바뀐다. 이 시대는 그냥 ‘이 시대’라고 규정되어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물상들과 인물들 사이의 차이도 그냥 대비되어서만은 안될 것이다.

작가도 그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인물을 빌려서, “우리에겐 없는 걸” 자꾸 찾는다. 그건 어디에 있을까? 돌 떨어진 풍선처럼 날아갔을까?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김연정 객원기자

◊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임현의 이번 소설을 읽다 보면 세 종류의 무너지는 탑 혹은 구조물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의 교만을 경고하려고 하느님이 무너뜨린 바벨탑, 완성한 자가 완성한 순간 스스로 흩어버리는 티베트의 모래 만다라, 그리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나 저절로 무너지게 고안된 어떤 탑이다.

이 세 종류의 탑 혹은 구조물은 누군가에 의해 구축되고 어떻게든 무너진다는 점에서라면 하나의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교만을 경고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바벨탑을 쌓도록 한 것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면 더욱 더 그렇다. 스스로 무너지도록 고안된 탑이라는 것도 고안한 자가 있으니 이와 다를 바 없겠고.

소설을 읽으며 탑을 떠올렸으니 탑은 소설일 것이며 저 스스로 무너지는 이 탑의 설계자며 시행자는 물론 임현일 것이다. 그런데 임현은 어째서 애써 스스로 무너지는 탑을, 그것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이 쌓는 걸까.

당초 그 탑이란 것이 불필요하거나 탑 쌓는 일 따위는 도무지 어리석다고 생각지 않고는 탑을 무너뜨릴 리 없는데 굳이 쌓는 걸 보면 아무래도 교훈을 위해 바벨탑을 쌓게 한 하느님의 의중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높고 화려하며 인간의 기술과 능력이 최대치로 발휘된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성공적 구조물. 마땅히 거룩히 여겨져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인간의 모든 규범들을 창출해내는 이 탑을 어찌 부실하게 지을 수 있을까.

그래서 정교하게 고안되었다고 말하는 것인데 임현의 경우 그 정교함이란 튼튼한 것처럼 보이되 실은 어느 순간 무너지도록 설계된 특수 아이디어 공법에 속한다.

이 탑의 이름을 편의상 조금 비약을 해서 ‘체계’라고 한다면 바벨탑의 비유에 암시되어 있듯 언어체계일 것이다. 말은 그 고유의 대상을 갖지 못하고 말의 뜻 또한 차이에 의해서만 발생해 약속으로만 유지되는 허상체계일 뿐이라고 하는 그 언어체계. 인간의 모든 사유와 규범의 출처고 욕망과 문명의 토대이되 실은 속이 텅 빈 탑파와도 같은 구조체. 그것을 흔들어 금 가게하고 실상을 노출시키기 위해 임현은 그에 관한 일상의 사례들을 차곡차곡 수집하여, 쌓아 올리는 듯하면서 무너뜨린다. 무너뜨리는 수단은 말할 것도 없이 언어교란이다. 이해라는 오해, 배려라는 독단,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배신, 소통의 체념과 포기에서 오는 공감과 연대, 한계가 주는 다양한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다 무너져 망했다는 지점에 피어나는 독특한 위안의 상황들.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삶을 얼마나 통째로 체계에 의존해 너나없이 헛된 탑을 짓고 그로 인해 끊이지 않는 혼돈과 번민의 고통을 억울하게 견디며 살아왔는지를 임현은 짓궂을 만큼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공든 탑을 무너뜨리려면 그 만큼 집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 위수정 ‘은의 세계’

《은의 세계》을 읽다 보면 막연하게 ‘궁극’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전에서 궁극이란 말을 찾아보면 그 뜻이 너무도 빤하고 납작하게 적혀 있어서 기대했던 궁극의 의미가 어쩐지 도망쳐버린 느낌이다. 말하자면 《은의 세계》는 그 도망친 느낌들이 모여 은거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궁극이라는 글자의 풀이는 다하고 다했다, 즉 더는 다다를 수 없을 만큼의 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다를 수 없을뿐더러 알 수 없는 지경이되, 또한 그러하기에 우리를 끝없이 매혹하거나 두려움으로 사로잡는 지점이다.

《은의 세계》에서는 그 지점에다 대체 기호를 부여하는데 그게 사랑과 죽음이다. 위수정의 소설에는 늘 사랑과 죽음이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다. 가히 사랑과 죽음은 끝내 다다를 수도 알 수도 없으면서 역설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기회적으로 매우 공평하게 주어지는 매혹과 두려움의 사태이기도 하니 소설의 제재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궁극은 우리를 끝없이 매혹하거나 두려움으로 사로잡는다고 했거니와, 그래서인지 《은의 세계》는 발랄하면서도 불온하고 발칙하면서도 서늘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가 싶으면 어느새 함구의 몸짓으로 비밀스런 여운을 남긴다.

《은의 세계》를 읽는 일은 그래서 터지기 쉬운 물주머니를 옮기는 일처럼 위태로운데 그것이 위태로운 까닭은 감당할 수 없는 궁극의 진실이 쏟아져 나와 읽는 이를 가없는 혼란에 빠뜨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면 아직 쏟아지지는 않았고 사랑과 죽음, 억제와 충동 사이의 반투명한 얇은 난각막이 가까스로 물주머니를 지탱하며 우리로 하여금 한 시도 거기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불이라는 신비가 멈춘 자리에 글이 생겨났다고 하는 아감벤의 말을 신비의 죽음이 아니라 글에 의해 다시 신비에 근접할 수 있다는 말로 읽을 수 있다면, 위수정도 독특한 글쓰기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궁극이 은거하는 세계와 현실 세계가 서로를 지탱하는 신비한 투명막의 언어를 잣는.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교수. / 오종찬 기자

◊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임현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 무언가에 대해 화가 나 있고 몹시 억울해 한다. 그 때문에 그 인물들은 화자의 서술 안에 얌전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밖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임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이 인물들이 세상을 향해 지르는 항변과 호소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항변과 호소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나 절규와 같다.

그의 인물들이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은 우선 사람들의 편향된 인식이다.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법 거칠다. “다들 자기 입장에서 보이는 것을 보는 것 아닙니까?”(‘목견’) 사람들은 한 장의 그림에서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볼 수 없다. 관점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본다. 임현은 사람들의 확신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확신하고 모를수록 확신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인물들은 그것 때문에 답답해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인간의 행운이나 불운이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는 것, 그 때문에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그의 인물들은 생각한다. “사람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결국엔 경로를 벗어나 버리게 된다.”(‘그들의 이해관계’) “세상에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그건 때때로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줍니다.”(‘나쁜 사마리안’) 누군가의 불행이 나의 행운의 이유인지 모른다는 주제는 신들의 질투를 피해 자기 반지를 바다 속에 던졌던 저 그리스의 폭군 폴리크라테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폴리크라테스는 자기의 연이은 성공을 신들이 질투하면 큰 불행이 닥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반지를 버리는 불운을 기획하지만 그 반지는 결국 충성스러운 어부에 의해 그에게 돌아온다. 그의 시도는, 적어도 그가 의도한 대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확실한 것은 없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이 생각은 윤리적이라기 보다 종교적이다.

“도대체가 나를 왜 가만두지 않나. 왜 자꾸 나를 위로해주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나.”(‘이해 없이 당분간’) 임현의 세계 인식은 이 문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어떤 친절은 본의와는 상관없이 차이를 부각시키고, 어떤 말은 말한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해되기도 한다는 것. 관대한 사람의 의도치 않은 차별에 대한 임현의 통찰은 ‘관대하게 차별받는다’(‘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는 문장으로 압축된다.

인간의 인식과 운명의 한계에 대한 진지하고 끈질긴 탐구의 문장이 매력적인 소설집이다. 이 작가가 조금 더 부지런해서 우리 소설의 품을 넓히고 또 깊이를 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 위수정 ‘은의 세계’

위수정의 단편들은 갑작스러운 전개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대사가 툭툭 튀어나와 전통적인 서사 전개에 익숙한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의 인물들이 괴팍하거나 유난히 특이한 캐릭터가 아니어서(오히려 평범하고 일상적인 편이다) 이 작가의 특이한 서술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기계적인 인과 관계나 개연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실제에 가까운 묘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갑작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리얼리티의 표현인지 모른다. 현실이 인과 관계나 개연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몸을 치고 지나가거나 12층에서 바닥으로 추락해 머리가 깨지는 장면이 어떤 장치 없이 불쑥 들어오는데, 그 장면은 더할 수 없이 실감나게 서술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해진다. 실감과 가상이 동시에 발현하는 이 현상은 그러나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흔히 겪는 현실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위수정 소설에 등장하는 이런 성격의 리얼리티는 예컨대 우리의 소통방식이 거짓말 게임과 같은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암시에서 한층 분명해진다.(‘안개는 두 명’) 거짓말 게임은 진실 게임과 비슷하지만 진실 게임과는 달리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그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진실 게임에서 누군가의 말은 수없이 많은 진실 가운데 한 가지를 곧장 가리키지만 거짓말게임에서 누군가의 말은 수없이 많은 거짓 가운데 단 한 가지를 가리킨다. 그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가지가 진실이 아닌 것에 포함된다. 그 한 가지를 알았다고 해서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은 모호함과 착각, 오해와 넘겨짚기, 혹은 내버려두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삶은 트루먼 쇼에 비유되고, 인간관계는 고장난 카메라로 태연하게 사진을 찍는 것으로 표현된다.(‘마르케스를 잊어서’) 카메라가 고장났다는 걸 찍는 사람도 알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이 트루먼 쇼는 한층 정교하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말 한마디 없이 마치 나에 대해 다 안다는 듯 차분한 눈빛으로 보고만 있는 남편 때문에 나는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풍경과 사랑’) 그래서 예컨대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는 일이 일어난다. 말하려고 하는 이의 손을 들어 자기 입을 막는 장면은 허공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하는 사람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말을 참거나 아무 상관없는(그런 점에서 허공이나 마찬가지인) 어떤 이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을 소통의 방식으로 택한 이 소설 속 인물의 모습은 씁쓸하지만 어쩐지 적확하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이명원 기자

◊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임현의 소설은 그 서술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목소리로 들린다. 목소리로 들리는데, 면전에서는 결코 하지 못할 말을 또박또박 다 하는 사람의 난처하고 난감하고, 심지어는 무례한,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말들이다. 선생님,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누군가 내 옷깃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면 그 말이 듣기 좋은 말일 것 같지는 않다. 딱히 잘못한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도, 내 안의 무언가를 움켜쥐는 것 같은 말. 움켜쥐어 꺼내놓고 이것 좀 보십시오, 하는 것 같은 말.

임현의 소설에 대해서는 흔히 윤리에 대한 질문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역시 그 말은 일견 타당해보인다. 그는 흔히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묻고, 선한 것과 선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묻고,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윤리에 관한 것이거나 그 해답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화자의 시선처럼 보인다. 묻는 자와 듣는 자의 시선. 대답은 필요없거나 소용없다. 말하자면 누군가 선생님 거기 좀 서보십시오, 라고 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당혹스러운 시선의 떨림. 당신은 누구입니까, 되물어야하는 순간의 서늘함.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닿을 데 없는 자리에 서사가 쌓인다. 소설 속 화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서사. 묻어두고 싶었던 순간들이 쌓여 만든 서사.

짧은 소설 ‘예정’의 뒷부분에 나오는 화자의 토로.

“아니면 저것은 무엇입니까. 저 육교 아래 저 얼룩, 전에는 없었는데 저 크고 선명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겁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내가 이곳에 없던 사이에 누가 사고를 당한 거 아닙니까. 그게 누구예요? 몰라요? 왜 모릅니까. 선생님이 알아야 하는 게 그거 아닙니까. 왜 당신한테 그런 말을 하냐니요? 내 일도 아닌 일에 왜 화를 내냐고? 그러면 좀 안됩니까? 다들 나한테 그러는데, 나는 왜 안 됩니까. 그럼 누구한테 말해야하는 겁니까. 그 노인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하는 겁니까.”

“나라고 뭐, 거기에 딱히 다른 의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쁘다고 생각했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도 생각했는데, 나쁘지, 나쁘긴 물론 나쁘지, 나쁘긴 나쁜데, 나쁜 말인데… 다만 생각이 많아졌을 뿐이다.”

위는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의 한 부분이고 아래는 ‘나쁜 사마리안’에 나오는 부분이다.

“오종구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말을 한다고, 실은 다들 어디서 들었던 말을 반복하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고 한참을 주정했다.”

그런가하면, 버스 안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 울음을 참고 있다 보니 버스가 노선을 한참 벗어나 달리고 있다. 급하게 하차벨을 눌렀으나 버스는 멈추지 않는다. 당장 세우라고 외치는 ‘나’에게 ‘이해없이 당분간’의 버스기사가 하는 말.

“좀 앉아요! 날 좀 가만 내버려두고 제발 저기 가서 앉으라고!”

그때 정작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있던 사람은 버스 기사였다. 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가.”

이 감상적인 문장의 속을 들여다봐야할 것이다. 문장 하나로 이토록 감상적이 될 수 있는 어떤 사건, 어떤 서사의 내부에 실은 얼마나 겹겹의 질문과 질문들이 샇여있는지를 본다면, 아마도 바로 그것이 임현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일 터이다.


◊ 위수정 ‘은의 세계’

어떤 낯선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있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주 익숙한 풍경인데, 문득 너무나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 그 풍경, 혹은 그 장면에 압도되어서 정작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압도된지도 모르는 채 사라져버리는, 어떤, 기묘한 정적의 순간들. 위수정의 소설은 당혹스럽다. 갑자기 툭 시작된 이야기가 툭 끝나버린다. 당혹스럽다는 말을 묘하다는 말로 바꿔보자. 위수정의 소설을 읽다보면 묘한 순간들에 사로잡힌다. 표제작인 ‘은의 세계’는 한 집에서 성장한 사촌동생을 가사도우미로 고용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단편소설이다. 펜데믹으로 인해 요가학원을 접고 가사도우미로 취업한 여동생,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일이 많아진 성우인 언니, 그리고 재택근무를 하는 형부가 있다. 언니와 형부는 펜데믹으로 인해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미룬 채 함께 살고 있는 중이다. 재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조우. 그런데, 여동생의 태도가 기묘하다. 어딘가 어긋나있는 듯한, 그러나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일상이 된 재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펜데믹이 아니다. 아마도 그 전부터 시작된 일상 속의 균열을 보고 있는 것일테다. 사촌은 어떻게 같이 살게 되었을까. 그 사촌 중의 하나는 왜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을까. 가사도우미로 일하러 와 매일같이 사소한 물건들에 손을 대는 여동생은 어떤 사람인 걸까. 독자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위수정의 대답은 한 문장이다. “혼자 있는 사람 같았다.”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는 뜻으로 읽히는 이 문장은 위의 여동생에 대해 하는 말이지만, 그래서 이 여동생의 이름인 ‘명은’을 쫒아 제목도 ‘은의 세계’인 것 같지만, 이 소설 속에서 혼자 있는 사람은 명은만이 아니다.

어떤 환각의 순간을 생생히 경험하는 형부 지환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 현실일까. 차가 나를 덮치고 그대로 지나갔는데, 죽은 것이 나일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 나일까.

이런 장면들은 그 이후의 소설들에서도 자주 변용되어 나온다. 마르크스가 묻힌 묘지에서 잠들었다가 그 사진을 찍히고, 그로 인해 그 사진작가의 집에 초청을 받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서는 한 자리에 있었던 네 명의 경험과 장면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똑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시간이 화자의 삶에 얹히면서 내용이 달라진다. 내용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감각도 달라진다. 이 소설에서는 죽음을 주제로 하여 사진전을 준비하는 소설 속 사진작가의 이런 말이 나온다.

‘헨리는 전시 준비 마지막까지 사인을 넣을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빼기로 했는데 생몰년도로 관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편이 더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왜 죽었는가보다는 죽음 그 자체가 더 중요했기에.’

위수정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왜 그렇게 되었는가보다는 그렇게 되어져버린 그 순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늘 ‘왜’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게는 위수경의 그 순간들이 낯선 것이 아닐까.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김연정 객원기자

◊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타고 오던 고속버스를 휴게소에서 놓치고 다음 버스를 타고 길을 가다가 연쇄추돌사고로 사망한 여성이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휴게소에 손님을 두고 온 버스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차를 돌려 휴게소로 갔고 그 덕분에 기적적으로 사고를 면했다. 이런 일은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두 가지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단편 「그들의 이해관계」에 등장하는 사건들이다.

이 작품은 자신이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더라면 사고가 있었던 시공간으로 아내를 보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를 고통스럽게 되새기는 이야기와, 너무나도 황당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왜 아내는 사고의 현장에 있어야 했나. 왜 사건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내여야 했나. 별다른 이유는 없다. 버스기사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환청에 신경 쓰느라, 한 사람이 덜 탔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휴게소에 손님을 두고 왔다, 그냥 계속 운전을 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가서 손님을 태우고 올 것인가. 기사는 경로를 벗어나서 손님을 태우러 휴게소로 갔고, 그래서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에 버스를 놓친 아내는 그 다음 버스를 얻어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 사고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만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할수록, 원인과 책임을 확정 짓기가 불가능해졌다.

그 지점을 두고 통상적이라면 운명이라고 했을 텐데, 작가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확률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현의 소설이 한없이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확률과 소설, 참으로 낯설면서도 신선한 조합이다. 작가는 소설이 제대로 다뤄본 적이 없는 확률의 세계를 소설의 언어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눈길이 작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마도 이 글이 임현의 소설을 제대로 읽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 위수정 ‘은의 세계’

표제작 「은의 세계」는 팬데믹의 일상을 배경으로 한다. 재택근무 중인 지환은 아내 하나로부터 사촌 동생 명은이 일주일에 한번 소독을 하러 올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나의 부모는 어린 경은과 명은 남매를 맡아서 하나와 함께 키웠다. 경은은 고등학교 때 죽었고, 명은은 가출, 결혼, 이혼 등의 이력을 쌓으며 집밖으로 떠돌았다. 지환의 집에 드나드는 얼마 안 되는 동안에도 명은은 컵라면을 몰래 먹어서 소독회사에서 해고당하더니, 임신을 해서 애인과 함께 살고 싶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은의 세계」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그 누군가는 사건의 전모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독자의 기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명은에 대한 정보는 맥락 없는 이야기나 파편적인 대화를 통해서 주어질 뿐이다. 중요한 사건인 것으로 보이는 경은의 죽음도 사고인지 자살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명은과 관련된 것은 제대로 말하여지지 않거나 아니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허깨비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현실적인 비현실이라고 할까. 분명히 우리와 함께 했지만 전혀 기억되지 않는 시간이나 인물들처럼, 명은은 선명한 이미지로 기억되지 않으며 의미있는 맥락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의미나 기억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이탈되거나 배제되어버린 삶의 장면들과 언어들.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지만 기억해 보려 해도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는, 삶의 타자들. 위수정의 소설들은 분명 함께 했지만 기억이나 이미지로 구성되지 않아서 여전히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는 삶의 타자들을 기록한다.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는 윤리학적인 몸짓이 작품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해하거나 실험적인 기법이 사용된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작가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철두철미하게 적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환기하는 작품이어서,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