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10월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영국인 인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테오도르 2세 황제가 영국인 선교사 헨리 스턴 일행을 심하게 구타한 뒤 쇠사슬에 묶어 감옥에 가뒀습니다. 명목상으론 스턴이 아비시니아에 대해 쓴 책이 모욕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이유를 댔지만, 그 저변엔 테오도르 황제가 자국 내에서 여러 세력에게 도전을 받고 있는데도 영국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분노가 깔려 있었습니다. 테오도르 황제는 스턴 석방을 위해 영국이 1864년 파견한 대표단도 투옥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실수였음이 곧 밝혀지게 됩니다. 절정기를 향해 달리고 있던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인질 구출 작전을 명했습니다. 명령은 콜카타·첸나이 등과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의 3대 프레지덴시 중 하나인 뭄바이에 하달됐습니다. 전 세계를 주름잡는 대영제국의 ‘신속대응군’이 출동할 차례입니다.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육군 중장 로버트 네이피어는 1867년 8월 작전에 필요한 부대 규모 관련 명세서를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인도) 원주민 기병 4개 연대, 원주민 보병 10개 연대, 영국 기병 1개 대대, 야전 및 기마 포병 3개 중대, 산악 기차 한 대, 140mm 박격포 1개 중대, 이중 가능하면 2문은 200mm로.”
이듬해 1월 홍해 연안에 도착한 원정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영국과 인도 병사 1만 3000명, 운반과 잡노동에 투입될 민간인 부역자 2만6000명, 노새와 조랑말 1만3000마리, 낙타와 수소 7000마리, 당나귀 1000마리, 코끼리 44마리 …. 영국의 기술과 자본, 설계, 조직에 인도의 노동력이 결합한 병참의 ‘대영제국식’ 모델이었습니다.
테오도르 황제는 외부에서 오는 군대가 640km나 되는 척박하고 험난한 길을 뚫고 아비시니아의 수도 막달라까지 올 수 있을거라 생각도 못했지만, 영국·인도 부대는 어느새 코 앞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1868년 5월 9일 불과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은 전투에서 대영제국의 군대는 상대를 완전히 박살냈습니다. 아비시니아군은 7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반면, 원정군 인명피해는 20명 부상이 전부였습니다. (이중 2명은 나중에 사망) 원정군은 여세를 몰아 나흘 뒤 아비시니아의 수도 막달라를 포위 공격했고, 테오도르 황제는 생포보다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 원정은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불과 9년 전 인도에서 영국 지배에 반대하는 거대한 항쟁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됩니다.
◇ 세포이
인도인 병사, 즉 세포이(sepoy)는 페르시아 말로 병사를 뜻하는 ‘시파이(sipahi)’에서 유래했습니다. 무굴제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포르투갈 상관들이 고용한 병사들을 모두 세포이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세포이라고 하면 영국 동인도회사를 떠올리는데요.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전역을 통치하는 ‘지배자’에 등극했고, 동인도회사에 복무하는 세포이가 무척 많았기에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동인도회사가 인도 곳곳에 공격적인 진출을 거듭하면서 첸나이, 뭄바이, 콜카타 등 대형 상관들은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춘 요새로 변신했습니다. 포르투갈, 프랑스 등 유럽 경쟁자들과도 싸워야 했고, 무굴제국이 쇠약해지면서 인도 각 지방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호족 세력과도 겨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들만으로 군대를 편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럽과 북미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대영제국 입장에서 인도에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수 없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동인도 회사는 고육지책으로 인도 대륙의 전사 계급, 즉 남부의 텔루구족 농민들, 서부의 쿤비스족, 중부 갠지스강 유역의 라지푸트족과 브라만 계급 등에서 자체 병력을 모집했습니다. 출신 종족들도 다양했고, 이들의 종교도 다양했습니다. 힌두교도 있었고, 이슬람교도 있었으며, 시크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영국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세포이를 현대식으로 훈련시키고, 제복을 입히고, 머스킷 소총을 지급했습니다. 물론 장교와 지휘관은 영국인들로 했습니다.
세포이는 곧 인도 주둔 영국군의 중추로 자리잡았습니다. 1881년 인도에 주둔한 영국 육군은 영국인 병력 6만9647명과 원주민(세포이) 병력 12만5000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인 군대와 아일랜드 군대가 각각 6만5809명, 2만5353명이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대영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총 병력 28만5809명 중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19만4647명으로 전체의 68%를 차지한 것입니다. 특히 세포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4%에 달했습니다.
세포이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십니다. 7년 전쟁(1756~1763)의 일부이면서 프랑스와 영국 중 누가 인도의 주인이 될 것인지를 결정짓게 한 플라시 전투(1757년) 때 영국인 군인은 750명이었던 데 비해 세포이는 2100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전투원 중 3분의 2 이상이 세포이였던 것입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의 지배자’에서 ‘인도의 지배자’로 올라서는 전환점이 된 아사예 전투(1803) 때도 웰링턴의 부대엔 상당히 많은 세포이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세포이는 영국이 인도 전역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세포이는 밖으로도 대영제국의 확장과 유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비시니아 원정처럼 말이지요.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싸워야 했을 때(1820년대 미얀마에서, 1843년 신드에서, 1840년대 펀자브에서) 인도 군대는 좀처럼 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반세기 동안에 인도의 병력은 중국에서 우간다까지 12회 이상 제국의 군사 행동에 공헌했다”고 말했습니다.
인도는 대영제국의 아시아 전초 기지였습니다. 이곳을 기반으로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중국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영국령 인도가 최대한 팽창했을 때 그 범위는 페르시아 남부와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는 “대영제국의 전략적 중추”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1857년 항쟁
세포이들의 최초 반란은 탄약 종이에 동물 기름, 특히 소와 돼지의 기름이 칠해져 있다는 소문이 발단이 됐습니다. 힌두교도에 소는 신성한 동물이고, 이슬람교도에게 돼지는 절대 입에 대면 안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총에 화약을 넣기 위해서는 입으로 탄약 종이(화약 탄포)를 물어뜯어 내야 했습니다. 그게 소기름이라면 힌두교 세포이들에게, 돼지기름이라면 이슬람 세포이에게 신성모독이었던 것입니다.
1857년 2월 26일 벵골의 제19보병대 병사들이 새로 보급된 탄약의 수령을 거부했습니다. 이어 3월 29일에는 동인도회사의 벵골군 세포이가 지휘관의 말을 쏘는 하극상이 벌어졌습니다. 급여와 진급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지면서 반항의 불꽃은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이 항쟁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종교전’였습니다. 세포이들은 이 항쟁을 ‘종교를 위한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인도 북부 메루트에서 반란 세포이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형제들,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여. 서둘러 우리와 합류하라. 우리는 종교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델리에서 “잉글랜드인들은 우리를 기독교도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한 뒤, 무굴제국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옹립하며 무굴제국의 통치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소작농민들까지 합류하면서 항쟁은 독립운동 성격까지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영국의 반격은 매서웠습니다. 서아시아와 중국 등 주변에 포진해 있던 영국군을 끌어들여 진압 작전에 나섰습니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 앞에 세포이는 무력했습니다.
항쟁에 일부 세포이만 참여한 것도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첸나이(마드라스)의 부대는 주로 타밀족 세포이가 많았는데, 이들은 불교도들이 많아 화약 탄포에 무슨 기름이 사용됐는지 등은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첸나이 부대는 영국을 지지하며 항쟁의 중심이었던 벵골군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뭄바이 부대도 거의 동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벵골군의 경우 75개 연대 중 44개 연대가 항쟁에 참여했는데 뭄바이쪽에선 겨우 3개 연대만 동조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밖에 시크교도들도 ‘무굴제국의 부흥’이라는 슬로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포이 항쟁은 4개월만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해 9월 영국군은 델리를 정복하고 무굴 황제를 체포했습니다. 영국은 기독교인 살해와 내란 선동 등 5개 죄목을 씌워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고 그를 미얀마로 추방했습니다. 이로써 무굴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 인도 황제 빅토리아
대영제국은 인도 통치에 대한 대수술에 나섰습니다. 본국 정부는 더 이상 인도를 동인도회사에 맡겨둬선 안된다고 판단했습니다. 1858년 8월 2일 영국 의회는 ‘인도정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골자는 영국 정부가 군 병력을 포함한 모든 동인도회사의 소유물과 행정권 등을 넘겨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인도회사는 청산 절차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국 정부의 직접 통치는 인도가 대영제국에서 독립하는 1947년까지 계속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58년 11월 포고문에서 인도 국민들에게 2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인도의 종교 문화에 대해 더 이상 간섭은 없을 것이란 점이었습니다. 세포이 항쟁으로 깜짝 놀란 대영제국의 반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모든 관직에서 영국인과 원주민이 차별없이 완전히 평등할 것이라는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약속은 현실에서 철저하게 지켜질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배하는 자(대영제국)와 지배를 받는 자(인도)는 그 지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참 재밌는 포인트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인도는 대영제국의 핵심 축으로 남아있었다는 점입니다. 대영제국 통치 말기가 되면 인도의 총 인구는 무려 4억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858년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 본국의 인도성 장관에게 서약을 하는 ‘서약직 공무원’은 대부분 10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핵심은 영국인들은 인도의 통치자들을 지배했고, 인도 국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는 대부분 인도 위정자들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퍼거슨 교수가 책 ‘제국’에서 소개한 내용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봉건적 인도의 윤곽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른바 ‘토후국들’이 인도 전역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거기에서는 영국인 비서관(다른 동방 제국들에서 ‘총리’라는 직함 아래 수행되는 역할)의 말똥말똥한 눈초리 아래서이지만, 전통적인 토후국의 왕들이 명목상 여전히 지배를 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직접 통치하는 영역에서도, 시골 지역의 대부분은 귀족적인 인도 지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커즌의 눈에는 인도의 천부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지금까지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를 애독해 주시고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