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자손을 보지 못하리라.”

30대 중후반에 접어든 헨리 8세는 이 성서 구절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고, 갈수록 걱정이 커졌습니다. 6세 연상인 에스파냐 출신의 왕비 캐서린은 원래 형 아서의 부인이었습니다. 아서가 결혼한지 반 년도 안돼 사망하는 바람에 동생인 헨리(후에 헨리 8세)가 캐서린과 다시 결혼한 것입니다. 모두 아버지 헨리 7세가 밀어붙인 정략결혼이었지요. 헨리 8세는 40대가 된 왕비와의 사이에 결혼 7년 만에 얻은 딸(후에 메리 1세) 하나만을 두고 있었습니다. 메리 이외 자식은 생길 때마다 사산하거나 유아 때 사망했습니다.

이 무렵 헨리 8세는 왕비의 시녀로 왕궁에 들어와 있던 앤 불린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20대인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프랑스에서 익힌 교양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자리에서도 할 말은 하는 당돌함은 왕을 더욱 안달나게 했습니다. 왕에게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리면 될 일이었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대서사는 이렇게 막이 올랐습니다.

◇천일의 앤

런던 버킹엄궁에서 템즈강을 따라 동쪽으로 약 4.5km 거리에 있는 런던탑은 제겐 개인적으로 앤 불린과 동의어로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 TV로 본 ‘천일의 앤’이라는 영화의 감동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아련한 여운이 남아있는데, 그 앤이 참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2007년 여름 처음 런던탑에 갔을 때, “이곳에서 앤이 목이 잘렸구나”하는 생각에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납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초상화. 앤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으나 밝은 성격과 우아한 행동거지, 당찬 성격으로 왕을 사로잡았다.

세상 모든 걸 태워버릴 듯 왕과 불같은 사랑을 했고 왕비에까지 오르지만, 결국 왕자를 낳지 못한 앤은 간통과 근친상간 등의 혐의로 런던탑에 갇힌 뒤, 참수형을 당합니다. 앤은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도 받았습니다. 앤은 화형 판결을 받았지만 남편 헨리 8세가 참수로 감형했습니다. 형이 확정되자 앤은 시녀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수는 당시 흔히 사용되던 도끼 대신 칼을 쓰기로 했고, 프랑스에서 칼을 잘 쓰는 사람을 데려와 형을 집행했다고 합니다. 비련의 주인공 앤은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딸 때문에 더욱 극적으로 역사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 딸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입니다.

◇튜더 혁명의 시작

영국과 영국인들에게 튜더 왕조는 영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왕조로 꼽힐 듯 합니다. 역사 연구와 책, 영화 등 튜더 왕조를 소재로 수많은 연구와 창작이 이뤄졌습니다.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헨리 7세, 앤 불린과의 사랑을 계기로 영국의 종교개혁을 촉발시키고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근대적인 변혁을 이끈 헨리 8세, 엄마가 참수되고 배 다른 언니(메리 1세) 통치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을 유럽의 강자로 이끈 엘리자베스 1세….

역사에서 ‘튜더 혁명’이라고 불리는 각종 개혁과 변화를 이끈 이 왕조는 헨리 7세의 등장과 함께 막을 올립니다.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가 1485년 8월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 가문 출신의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승리, 왕조에 오릅니다. 장미전쟁의 마지막 페이지는 결혼으로 장식됩니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을 통합했습니다. 백년전쟁(1337~1453), 장미전쟁(1455~1485)을 뒤로 하고, 이제 영국은 근대로 성큼 발을 내딛게 됩니다.

튜더 왕조는 헨리 7세 → 헨리 8세(1509~1547) → 에드워드 6세(1547~1553) → 메리 1세(1553~1558) →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로 이어집니다.

18세에 왕이 된 헨리 8세는 머리가 좋았고, 여러 방면에서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라틴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를 알았고, 석학들과 천문학과 신학·수학을 논했으며, 승마와 사냥, 활쏘기, 마상 창시합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화려하고 방탕한 삶을 즐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략결혼과 자신의 왕위를 이을 왕자를 얻는 문제가 그의 인생과 통치에 먹구름을 드리웠습니다. 이와 함께 영국 역사도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백년전쟁 이후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에스파냐는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두 나라는 헨리 7세 때인1489년 ‘메디나 델 캄포’ 조약을 맺었는데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고, 두 왕가의 결혼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501년 당시 16세인 에스파냐 캐서린 공주가 영국으로 건너와 헨리 7세의 맏아들 아서(15세)와 결혼을 했습니다. 병약했던 아서가 사망하자 동맹을 깨고 싶지 않았던 헨리 7세는 차남인 헨리를 캐서린과 다시 결혼시켰습니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헨리 8세는 1527년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캐서린은 원래 형수였기에 자신과의 결혼 자체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이혼을 주장한 진짜 이유는 앤 불린 때문이었습니다. 캐서린과 헤어진 뒤 왕자를 낳아줄 것이 틀림없는 앤을 왕비로 삼으려 했던 것이지요.

계획은 나라 안팎에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우선, 캐서린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캐서린은 “전 남편 아서와 결혼은 했지만, 실제 잠자리는 하지 않았다”면서 자신이 처녀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법적으로 이혼은 불가하다고 맞섰습니다.

헨리 8세의 이혼을 가로막는 진짜 적은 나라 밖에 있었습니다. 교황과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였습니다. 헨리 8세가 이혼하려면 교황의 승인이 있어야 했는데 교황은 이혼에 반대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교황의 뒤에는 카를 5세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선 카를 5세가 강자로 군림했는데, 1527년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손에 넣은 이후 교황은 카를 5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카를 5세는 캐서린과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캐서린은 카를 5세 어머니의 여동생, 즉 이모였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캐서린과 이혼하겠다는 헨리 8세의 의도는 관철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헨리 8세는 아예 로마 교황과의 결별을 결심하게 됩니다.

유럽 대륙에서 진행된 종교 개혁과 영국의 종교 개혁은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대륙에선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시작됩니다. 대륙의 종교 개혁이 영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영국에선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이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열렬한 종교개혁파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의 초상화(왼쪽)를 그린 것은 물론 루터의 저서에 강렬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오른쪽 그림은 1523년 크라나흐가 제작한 소책자 ‘교황나귀’의 표지 그림. 기형적인 나귀의 모습은 타락한 교황권을 상징한다. 21세기북스

헨리 8세는 새롭게 등장한 개신교와 의회라는 두 개의 무기를 양손에 들고 로마 교황과 기존 가톨릭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영국 사회 분위기도 반성직주의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헨리 8세가 루터파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지만 루터를 좋아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교황과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는 자신이 “루터의 적”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정통 가톨릭 신자를 자부했던 헨리 8세는 루터를 논박하는 논문을 써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루터도 헨리 8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헨리 8세를 향해 “악당이자 광대, 적스리스도의 도구” “지독히 부패한, 벌레 같은 존재”라고 험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감정이나 대립은 정치 세계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의회는 헨리 8세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의회에 진출한 젠트리들은 대륙에서 넘어온 새로운 교리에 빠져들었고, 기존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공격에서 선봉에 서게 됩니다. 1529년 소집된 의회는 1536년까지 ‘왕의 입맛에 맞게’ 정말 중요한 법들을 통과시킵니다. 이 때의 의회를 ‘종교개혁의회’라고 부릅니다.

1532년 헨리 8세는 이른바 ‘성직자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의회는 1533년 3월에는 로마에 상소하는 것을 막는 ‘상소제한법’을, 1534년 초에는 ‘왕위계승법’을, 그해 말에는 영국 종교 개혁의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장법’을 제정합니다. 이로써 영국 왕은 10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교황과의 공생 관계를 끊어내고, 영국 땅에서 정치적인 의미는 물론,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영국은 이제 어떤 외부 세력의 간섭도 받지 않은 완전한 주권국가가 됩니다. 교황으로부터도 말이지요.

이 과정에서 헨리 8세는 1533년 1월에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을 하고, 3개월 후에는 앤을 여왕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해 9월에는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수도원 해산과 젠트리의 성장

헨리 8세의 개혁은 정치와 종교 뿐 아니라 사회·경제 분야에서도 혁명 수준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해산입니다. 당시 수도원은 잉글랜드 전체 토지의 거의 3분을 1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왕과 의회가 이 수도원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536년에는 연수입 2000파운드 이하의 작은 수도원 300여곳을 해산했고, 이후 규모가 큰 수도원 500여곳을 없애버렸습니다.

수도원 해산은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우선, 영국 사회가 기존 가톨릭에서 벗어나 개신교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더욱 큰 사회적 변화는 영국의 사회 계층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해산된 수도원의 땅과 재산은 일단 국왕에 귀속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매각됩니다. 이 매각 토지·재산은 기존 젠트리나 부유농인 요우먼 등에게 돌아갔는데, 더욱 부유해지고 사회적 신분이 상승한 요우먼들이 대거 젠트리에 합류함으로써 영국 개혁의 중심 세력인 젠트리 계층은 수가 크게 늘어나고 탄탄해지게 됩니다. 이들은 다음 세기에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을 주도하게 될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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