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다이아몬드 팔찌 한 쌍이 746만 스위스 프랑, 우리 돈으로 약 97억원에 낙찰됐습니다. 각각 1~4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56개가 달린 이 팔찌의 경매 소식이 외신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보석의 화려함이나 비싼 가격 때문이 아니라 팔찌의 주인이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기 때문입니다. 이 팔찌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한 지 6년, 왕비가 된 지 2년이 되던 1776년에 구매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기 3년 전이네요. 팔찌의 당초 낙찰 예상가는 200만~400만 달러(24억~49억)였는데 실제 경매에선 2~4배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나 15세 때 한 살 많은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만 38세 생일을 불과 2주일 앞두고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기요틴(단두대)에 목이 잘린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1793년 10월 16일이었습니다. 그의 남편 루이 16세도 9개월 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참수형을 당합니다.
왕과 왕비의 참수는 프랑스 대혁명의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입니다. 프랑스는 혁명 발발 이후, 루이 16세의 폐위와 제1공화정 수립(1792), 왕과 왕비 참수(1793), 나폴레옹의 등장(1795), 제1제정(1804), 왕정복귀(1815년), 제2공화정(1848), 제2제정(1852), 제3공화정(1870~1940)으로 이어집니다. 대혁명에서 제3공화정에 이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게 됩니다.
영국에서도 혁명 세력에 의해 왕이 참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난 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1603~1625)로 즉위, 스튜어트 왕가 시대가 열립니다. 그 다음 왕이 찰스 1세(1625~1649)인데, 그가 바로 청교도 혁명 때 참수형을 당한 왕입니다. 왕의 목이 잘리는 시기만 놓고 보면 영국이 144년 앞선 것입니다.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잡고 왕의 목을 치는 것은 비슷한데 그 혁명 세력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이후 역사는 어떻게 흘렀는지는 두 나라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루이 16세와 삼부회,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상이군인회관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프랑스 대혁명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여러가지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7년 전쟁(1756~1763)의 패배로 해외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크게 뒤처지게 됐습니다. 와신상담하며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다 1775년 발발한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했는데, 엄청난 전비(戰費) 지출로 국가 재정은 더욱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프랑스는 1780년대까지 세수의 절반 이상을 국채 이자를 갚는데 써야 했습니다.
1787년과 1788년에는 끔찍한 흉년이 덮쳤습니다. 빵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 시민들은 배고픔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1789년 7월 중순 빵 가격은 18세기 중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모순은 폭발 직전에 도달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세상에 분노한 민중들의 폭동과 시위가 잇따르자 루이 16세는 1787년 제 1신분과 제2 신분, 즉 귀족과 성직자 144명으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이들이 세제 개혁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제3신분(평민)을 포함한 삼부회를 개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1789년 5월 5일 175년 만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열리게 됩니다. 참석자는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이었습니다.
혁명에 에너지를 주고 투쟁을 이끌어갈 이념과 혁명 주역들도 이미 충분히 성숙했습니다. 근대 이후 물질문명은 빠르게 발전했고, 산업혁명은 폭발적인 생산력 발전과 함께 변혁을 주도할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를 탄생시켰습니다. 영국의 여러 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켜보면서 자유와 평등, 인권, 박애, 재산권, 국가 주권 등에 눈을 크게 됐습니다.
삼부회에 참여한 제3 신분, 즉 평민 대표는 빠르게 권력 중심으로 다가갔습니다.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1789년 6월 17일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합니다. 이들은 대혁명이 터지자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헌법 제정에도 착수합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파멸로 빠져들었습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 망명을 시도하다 붙잡혀 파리 탕플탑에 갇히게 됩니다. 이 사건은 또 한번 프랑스 국민들을 분노와 충격에 빠뜨렸고, 왕에 대한 실망과 함께 공화정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1792년 보통선거로 뽑힌 국민공회는 9월 21일 첫 회의 때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포합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태양왕’ 루이14세(1643~1715)가 구축한 절대왕정이 80년이 못 돼 붕괴한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와 기요틴
루이 16세는 새로 생긴 혁명 정부로부터 국가반역죄로 기소돼 1793년 1월 19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이틀 뒤 콩코드 광장에서 공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단두대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군중들을 향해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재판에서 왕에 대한 참수를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주인공은 로베스피에르였습니다. 삼부회 소집 때 ‘제3신분’ 대표로 참석한 그는 급진적인 자코뱅당의 일원이 됩니다. 왕의 재판에서 로베스 피에르는 “왕은 무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무죄가 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이에 와서 혁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을 죽여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전쟁 내각인 ‘공안위원회’를 접수, 1974년 7월까지 공포정치를 실시합니다. 로베스 피에르와 그가 이끄는 산악파(자코뱅당 내 빈민과 노동자, 급진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좌익 파벌)는 ‘상퀼로트’라는 세력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상퀼로트는 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 즉 긴바지를 입은 근로자라는 뜻으로 귀족 또는 부유한 시민이 아닌 노동자나 무산계급 등 급진적 민중들을 가리켰습니다. 공포정치 기간 중 약 30만명이 체포되고, 1만500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됐습니다. 왕과 왕비는 물론, 혁명 동지였던 조르주 당통도 그의 단두대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결국 단두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찰스 1세와 권리청원, 그리고 청교도
이제 장소와 시간을 1640년대 영국으로 옮겨보겠습니다. 스튜어트 왕가가 시작될 무렵, 영국에선 종교 문제가 나라를 뒤흔드는 빅 이슈로 등장합니다. 영국 교회는 헨리 8세(1509~1547)가 국교회를 설립한 이후, 가톨릭과 국교회, 퓨리턴 등으로 세력이 나뉩니다. 특히 칼뱅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퓨리턴은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570년대에 처음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지방 젠트리와 런던 등 도시 시민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들이 퓨리터니즘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엔 수면 아래 잠재했던 종교적 갈등은 제임스 1세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불꽃이 튀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제임스 1세는 교회 개혁안을 놓고 퓨리턴과 격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톨릭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1604년 소집된 첫 의회가 가톨릭에 적대적 성향을 보이자 왕도 가톨릭에 대한 억압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톨릭 신자들이 왕과 의회 모두를 폭약으로 날려버리려 꾸몄던 계획이 ‘폭약 음모 사건(1605)’입니다. 계획은 미수로 끝났지만 이 때 체포돼 처형된 ‘가이 포크스’는 이후 저항의 상징이 됐고, 매년 11월 5일이 되면 영국 전역에서 화려하게 열리는 불꽃놀이 ‘가이 포크스 데이’의 기원이 됩니다. 폭약 음모 사건으로 영국은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해졌고, 개신교의 중심지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1618년 유럽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터지고, 영국도 전쟁의 포화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개신교도인 제임스 1세의 사위 프리드리히(팔츠의 선제후)가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고, 영국인들이 프리드리히 지원에 나서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 속으로 휘말리게 됩니다. 이 전쟁의 파장과 후유증은 찰스 1세 때에 본격화됩니다.
팔츠를 구원하기 위해 파병된 영국 군대는 찰스 1세 때 질병과 굶주림으로 괴멸 수준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전비(戰費)를 놓고 왕과 의회는 갈등을 거듭했습니다. 1627년에는 프랑스와도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전쟁과 종교, 왕과 의회의 대립은 다가올 혁명의 전조였습니다.
1628년 3월 세번째 소집된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청원’을 내밀었습니다. 의회 승인 없이는 세금과 기부금 등을 걷을 수 없고, 자유인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는 구속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권리청원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1215) 등과 함께 영국 헌정의 빛나는 금자탑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지만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영국은 본격적인 내전과 혁명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