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처럼 애지중지하는게 하나 있습니다. 벽걸이 달력만한 크기의 한 장짜리 영국 왕위 계보도입니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기념품점에서 산 것인데,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가격은 10파운드(약 1만5500원) 안팎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은 영국의 왕과 여왕(Kings & Queens of England)입니다. 둘둘 말아놓았던 것을 거실 바닥에 놓고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라 똑바르게 찍히진 않았네요. 계보도를 보면 영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보는 듯 합니다. 영국인들이 자신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설명해주려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이 계보도를 보면서 영국이란 나라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왕위 계보도

최초의 왕은 에그버트(802-839)입니다. 그림에 나온 설명은 이렇습니다. “모든 영국인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색슨족 왕.” 여기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브리튼섬에는 로마인들이 떠난 이후 5세기 중엽부터 앵글로색슨족이 본격적으로 침입해 들어옵니다. 브리튼섬 남동쪽에 처음 세운 왕국이 켄트이고, 이후 서식스, 웨식스, 에식스, 노섬브리어, 이스트앵글리어, 머시어 등이 들어서 7왕국 시대가 열립니다. 이들 왕국 중에서 가장 힘세고 영향력 있는 나라의 왕을 ‘브레트왈더(Bretwalda)’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패왕(覇王) 또는 패주(覇主)의 개념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웨식스의 왕이었던 에그버트는 827년 이 브레트왈더에 등극, 브리튼을 호령합니다.

에그버트의 손자가 알프레드 입니다. 그림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대왕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 영국 왕 중에서 유일하게 대왕이라 불리는 사나이. 그 바로 밑줄에 적힌 한 문장에 눈길이 갑니다. “윈체스터에 묻혔다(Buried at Winchester).” 이제 알프레드를 찾아 여행을 떠날 시간입니다.

◇ 왕의 도시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윈체스터(Winchester)는 특파원 시절 꼭 가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중 하나였습니다.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중세의 판타지를 품고 있는 도시에 들어설 무렵엔 심지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열 살 꼬마가 처음 디즈니랜드에 발을 들여놓을 때, 커피 마니아가 미국 시애틀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에 갔을 때 이런 기분일까요.

인구 4만5000명, 도시라기보다 마을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 법한 이곳. 영국에서 손꼽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윈체스터 대성당엔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648년 처음 성당이 세워졌고, 1079년 재건축, 그 이후 500년에 걸친 증·개축을 걸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작가이자,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작가라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이 묻혀 있고, 중세 웨식스 왕국의 역대 왕들 유골이 합장된 함의 존재는 자석처럼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시내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그레이트홀(The Great Hall)’. 13세기 노르만 왕조 시절 건설된 이 건축물도 인기가 좋습니다.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원형 탁자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바로 아더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원탁(Round Table)입니다. 하지만 이 원탁이 실제로 아더왕과 기사들이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아더왕 자체가 전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레이트홀에 있는 아더왕의 원탁

무엇보다 이 도시가 제 마음을 설레게 만든 건, 이 곳이 바로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71~899)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앵글로색슨 왕국 시절 윈체스터는 웨식스의 수도였습니다. 앞서 잠깐 얘기한대로 웨식스는 9세기에 노섬브리어와 머시어 등을 제치고 7왕국의 맹주(盟主) 떠올랐습니다. 한편, 8세기 후반부터 브리튼섬에 바이킹들이 출몰하기 시작하고, 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이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집니다. 여러 왕국이 멸망했고, 앵글로색슨의 브리튼 시대는 곧 막을 내릴 듯 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바로 알프레드 입니다. 그는 바이킹 침입으로 태풍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롭던 웨식스, 그리고 브리튼섬을 구하고, 결국 이 섬을 앵글로-색슨의 나라가 되게 한 주인공입니다. 어디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알프레드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부를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가진 첫 번째 사람이다.”

◇ 하이드 애비

2018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찾은 이 도시의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칼을 든 대형 알프레드 동상이었습니다. 1901년에 세워졌다는 이 동상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 동상

“웨식스의 왕 알프레드는 덴마크 침입자들을 웨식스에서 몰아냈다. 그는 곳곳에 요새를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윈체스터는 그의 수도였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알프레드는 영국 왕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학문과 수도원의 부흥을 장려했고, 영국 왕국의 기초를 놓았다.”

구름 낀 약간 흐린 날씨.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가 온다해도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영국 날씨가 그런 것이니까요. 작은 도심이라 충분히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대성당과 그레이트홀을 둘러본 뒤, 목적지 없이 걷다 한 도로 이름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킹 알프레드 플레이스.’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말이죠. “이곳 주변 어딘가에서 알프레드를 만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그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닐까.” 이때부터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길 끝에 ‘하이드 애비 가든’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 설명서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이드 애비 가든

“이 곳은 중세 하이드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수도원은 1110년에 설립됐고, 1539년에 해체됐다. 이 곳은 알프레드와 아내 얼스위드(Earswith), 그리고 아들 에드워드(King Edward the Elder, 899-924)가 묻혔던 장소이다.”

이 글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은 제 생애 가장 심장이 강하게 뛰었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글을 읽고 가든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십자가 표식이 셋 있습니다. 알프레드와 아내, 아들이 묻혔던 곳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후, 책과 자료, 인터넷 등을 뒤지면서 알프레드 흔적 찾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알아낸 내용은 이렇습니다. 899년 사망한 알프레드는 윈체스터 ‘올드 민스터’에 처음 매장됐습니다. 이후 그의 시신은 903년 ‘뉴 민스터’로 이장됩니다.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침략한 1066년 이후, 올드 민스터는 노르만 성당으로 대체되고, 뉴 민스터와 그 수도사들은 바로 성벽 너머에 있는 하이드 사원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바로 제가 갔던 그 장소입니다. 알프레드를 제외한 다른 왕들의 유골은 한 곳에 모아졌고, 오늘날 윈체스터 대성당 콰이어 스크린(Choir screen) 위에 있는 상자에 담겨졌다고 합니다. 알프레드의 할아버지 에그버트와 아버지 애설울프의 유골도 함께 섞여 있다고 합니다.

◇ 헨리 8세

알프레드의 유골은 400년 넘게 하이드 수도원에 묻혀 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인 헨리 8세 때 큰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헨리 8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도원을 탄압했고, 대부분을 폐쇄시켜버립니다. 하이드 수도원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지요. 이 얘기는 나중에 또 하게 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수도원 해산 이후, 하이드 수도원 자리는 개인 주택으로 바뀌었고, 알프레드의 무덤 자리라는 것도 한동안 잊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1788년에 이곳에 브라이드웰 이라는 교도소가 들어서는데, 죄수들이 돌들을 제거하다가 알프레드 무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게 누구의 것인지 몰랐고요. 관은 납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죄수들은 그 납을 팔아먹었고, 그 안에 있던 유골과 매장품을 다 비운 뒤 관을 해체해 텅 빈 상태로 다시 묻었다고 합니다. 알프레드의 유골은 이렇게 하이드 애비 주변 흙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하이드 애비 가든을 다 둘러보고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할 때 사나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땐 비를 그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영국의 비는 우리나라 장맛비와는 달리 그리 오래 내리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알프레드의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